공동체를 말하지만 공동체를 살지 못한다면
상태바
공동체를 말하지만 공동체를 살지 못한다면
  • 최태선
  • 승인 2023.04.19 1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태선 칼럼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내용이 전혀 새로운 경우 그 기쁨은 그다지 크지 않다. 물론 지평을 열어주는 경우에는 오히려 전혀 새로운 그것이 더 큰 기쁨의 이유일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책을 읽는 기쁨은 내가 아는 사람이나 공감하는 내용, 혹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이 등장하거나 그 사람의 책이 인용되는 경우이다.

요즘 책을 한 권 번역하고 있는데, 이 책에 내내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동안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내가 처음부터 공동체로 인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어떤 책을 읽을 때보다 번역을 하면서 큰 기쁨을 느끼고 있다. 이제 마지막 결론과 그 뒤에 주석(註釋)만 남았다. 결론 전 마지막 장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이번 장에서 우리는 테레사(아빌라), 도로시 데이, 헨리 나웬, 토마스 머튼, 그리고 존 하워드 요더 역시 그들의 삶이 끝날 무렵 그들이 말하는 것의 현실을 알았다고 믿도록 초대받았다. 십자가의 길에 대한 이러한 신뢰는 특히 우리의 꿈과 명성이 제단에 올려질 때 우리를 변화시키고, 자매와 형제들과 함께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함께 분별한다. 때때로 우리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방식대로 사물을 보지 못하는 공동체 자체와 그 지도자이며, 하느님이 우리 모두와 함께 새롭고 부활한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

열거된 사람들만이 아니다. 이전 장들에서 더 많은 내가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특히 이번 장에 인용된 사람들의 경우는 그들이 인용된 이유 덕에 더 절절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기쁨 또한 더 컸다. 그런데 그 마지막에 와서 정말 큰 울림으로 다가온 내용이 바로 위의 내용이다.

그들의 삶이나 어록은 이들 자신의 책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인용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수많은 책과 저술들을 남겼다. 그들은 정말 많은 것을 남긴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그러한 말하는 것들의 현실을 알았다고 믿도록 초대받은 것은 그들의 삶이 끝날 무렵이었다.

분명 그들은 자신의 한 말이나 책에 쓴 내용들에 대해 자신이 잘 알고 있고 정통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자기에게 익숙한 것들의 현실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의 삶이 끝날 무렵이었다. 정말 공감이 갔고 그리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내 삶 역시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내가 이들에게 공감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들이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내가 그다지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을 통해 다시 한 번 나를 지금까지 이끌어 오신 주님의 손길을 더 많이 알게 해준다.

요더와 이 장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헨리 나웬의 이야기를 통해 등장하는 장 바니에 역시 공동체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준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러나 성범죄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던 것들을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회의하게 만들기도 했다. 요더의 공동체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내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던 대로 그는 낙제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한 가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는 영웅이나 위대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향력 때문에 공동체에 녹아들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공동체는 얼마 되지않아 와해되고 말았다. 그런 그가 말해주는 것들은 성공한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많다. 그는 대표적인 반면교사로서 자신이 살아서 이야기한 많은 것들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장 바니에는 2015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지만, 생전 여성 6명을 성적 학대한 사실이 드러났다. (사진 출처=플리커)
장 바니에는 2015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지만, 생전 여성 6명을 성적 학대한 사실이 드러났다. (사진 출처=플리커)

장 바니에의 경우는 더욱 이해하기가 어렵다. 금수저 출신의 그가 그냥 공동체도 아니고 장애인 공동체를 만들었고, 헨리 나웬과 같이 영향력 있는 사람까지 변화시킬 수 있었던 그가 그동안 많은 여인들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진리에의 근접한 경우에도 우리의 심성은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말해준다. 그 역시 사제로서 공동체와 영성이라는 측면에서 대가가 되었고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서는 대가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반면교사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십자가의 길에 대한 이러한 신뢰는 특히 우리의 꿈과 명성이 제단에 올려질 때 우리를 변화시키고, 자매와 형제들과 함께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함께 분별한다.”는 다음 말이 정말 실감이 난다. 십자가의 길에 대한 신뢰가 우리의 꿈과 명성이 제단에 올려질 때 드러난다. 우리의 꿈과 명성은 제단 위에 올려져 재도 남기지 않을 만큼 불타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요더와 장 바니에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성취를 이루어냈어도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서 모두가 동등한 자매와 형제 중 하나일 뿐이다. 이 하느님 나라의 평등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세상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이다.

큰 자가 되려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큰 자가 되려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 역시 부자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와야 한다. 큰 자들 역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그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장 바니에는 그 일을 참 잘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들과 함께 작아지거나 그들보다 낮아져야 했지만 어쩌면 그의 위치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작아지는 일에서 실패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다른 자매와 형제들과 함께 분별하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꿈과 명성을 제단에 올려 불태웠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 일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말년에 드러났다.

헌신과 충성은 죽을 때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잠시라도 경계를 소홀히 하는 순간 우리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얼마나 불행한가. 대부분의 목사와 장로들이 자신의 헌신과 충성에 최고점을 매기고 있지 않은가. 그런 그들이 불쌍하다. 하느나님 나라에는 큰 자도 영웅도 그 어떤 위인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알게 될 것이다.

“때때로 우리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방식대로 사물을 보지 못하는 공동체 자체와 그 지도자이며, 하느님이 우리 모두와 함께 새롭고 부활한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말은 그야말로 내 심금을 울린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위대한 선언인가. 공동체는 십자가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런 일이 이단들의 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십자가 타령을 해도 그 결과가 똥통에 빠지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공동체는 복음의 모판이며 하느님 나라의 전진기지이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방식대로 사물을 보지 않는다. 반대로 세상은 공동체의 사람들처럼 보지 못한다. 모두가 이기려는 세상에서 그들은 기꺼이 한 걸음 물러나, 지는 사람들이 된다. 모두가 부자가 되려는 세상에서 그들은 가난한 자로 살기를 원한다. 힘과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기꺼이 종이 되어 섬긴다. 모두가 작아도 확실한 행복(소확행)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기꺼이 희생의 삶을 산다. 무엇보다 편리한 개인주의를 버리고 그들은 함께 모여 살아야 하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한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그들이 주목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을 주님처럼 섬김으로써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다. … 이런 이야기들은 끝이 없다.

그렇다. 공동체 자체와 그 지도자가 십자가이다. 공동체가 사라진 그리스도교에서 십자가가 사라진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 모두와 함께 새롭고 부활한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 예수의 부활은 공동체 사람들을 통해 오늘도 재현되고 있다. 정말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공동체를 향해 갈 수밖에 없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마실 수 있습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