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부활을 축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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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부활을 축하할 수 없다
  • 최태선
  • 승인 2023.04.1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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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부활의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한다. 자신을 위해 살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이란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과 어려움에 처한 우리가 가서 도와야 할 이웃이다.

물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늘 인용하는 함석헌님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를 묵상해보라. 다른 것이 아니다. 시에서 열거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평생을 교회에 다니고 수십 차례 부활을 축하해도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게 되지 않고 서로 사랑하게 되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자체가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변질된 교회가 완전히 그리스도교를 장악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변질된 그리스도교가 온전하게 공고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사람들이 부활의 삶을 살아가지 않고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사진출처=eldertomoser.wordpress.com
사진출처=eldertomoser.wordpress.com

간혹 그리스도처럼 희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특별한 영웅으로 만든다. 그래서 흠모하고 경원하긴 하지만 그런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낄 수 없다. 그렇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자기 자신들은 물론 그렇게 희생적인 삶을 산 사람들까지도 하느님 나라 밖으로 몰아낸다. 하느님 나라에는 영웅이 없기 때문이다. 영웅이 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 속한 사람들은 내가 하고 있는 말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흔하게 본회퍼가 회자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값싼 은혜란 제자가 되지 않은 대가이다. 그래서 평생을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제자도에 잠시 심취하는 것으로 자신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착각을 한다.

예수의 제자는 오직 공동체 속에서만 양육될 수 있다. 나는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이단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재산을 빼앗긴다든지 혹세무민을 떠올린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라는 울타리가 필요하다. 그곳에서 서로 부딪혀야 한다. 무엇보다 용서와 사랑을 배워야 한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용서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는 그런 용서와 사랑을 경험할 수 없다. 단언하지만 한 번 틀어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 교회에서 어떻게 사랑과 용서를 배우고 마침내 서로 사랑하는 영원한 자매와 형제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살인자와 살인자의 가족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푼 아미시 사람들을 기억한다. 살인자의 가족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검은 옷을 입은 천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자와 살인자들의 가족을 용서하는 것보다 이웃과의 사소한 다툼을 용서하기가 더 어려웠다는 말을 한다. 그런 이웃과의 사소한 갈등을 넘어서면 원수에 대한 용서가 가능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우리에게 설명해준다.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 어디인가. 바로 공동체이다. 그들 가운데서는 끊임없이 용서와 화해가 반복된다. 그리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영적 근육이 형성된다.

내가 공동체에 미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오래 전에도 자신이 두레 공동체에 있었다면서 “공동체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집요하게 나를 물고 늘어졌다. 빈정거리고 무시했다.

만일 그가 진정한 공동체의 경험을 했다면 그렇게 빈정거리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지닐 수 없다. 그가 경험한 두레 공동체가 끊임없이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집단수용소와 같은 곳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대응하고, 공동의 선을 위해 희생하고, 하느님을 위해 용기를 내는 어린이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 아이들의 영혼은 기쁨을 나누고, 솔직한 용서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축하하는 연합의 경험을 통해 예언자의 삶을 위해 깊이 자양분을 얻고 강화된다. 아아, 하지만 우리 세계에서 그러한 유산은 정상이 아니라 예외적이다.”

나는 손자를 데리고 산책을 할 때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폐지수거를 하시는 할머니와 노숙자 선생님 앞을 지나간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시키고, 노숙자 선생님에게 돈을 드리면서 노숙자 선생님에게도 인사를 시킨다. 내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내 어린 손자의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대응하고, 공동의 선을 위해 희생하고, 하느님을 위해 용기를 내는” 손자의 능력을 살려내기 위함이다. 내게 그런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공동체는 비록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에서 자녀 양육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서도 똑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교회에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마저도 못해서 ‘냉담’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겠는가. 오늘날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가진 신앙의 허구성을 볼 수 있고, 그것을 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성공도 부도, 그 외의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성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들은 박해 받아야 하고, 언제든 비참한 죽음을 자신이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모의 신앙을 따라 그리스도를 선택했다.

그리고 오늘날 아미시들에게서 그와 똑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아미시 아이들은 학교를 마친 후에 세상으로 나가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본다. 그것을 ‘룸슈프링아’라고 부른다. 육개월 혹은 일 년을 그렇게 살다 아미시 공동체로 들어와 그들은 자신의 전적인 책임으로 결정을 한다. 아미시에서 평생 살 것인지 아니면 세상으로 나갈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아미시 아이들은 이때 아미시 공동체를 선택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부활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부활의 삶이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부활절은 내게 가장 슬픈 날이 되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부활을 축하하는 대신 나는 오늘도 썩을 것으로 심는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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