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희망의 징표-아나스타시스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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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희망의 징표-아나스타시스를 중심으로
  • 김혜경
  • 승인 2023.04.10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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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의 명화 속 사유와 현실-9

4월은 대부분, ‘거의’ 대부분 부활이 있는 달이다. 매우 드물게 조금 일찍 3월 말경, 부활절을 맞는 때도 있지만, 정말 ‘거의’ 4월에 맞이하는 게 일반적이다.

오늘은 부활에 관련된 회화 가운데 조금 특별한 작품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봤으면 한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부활을 주제로 한 이콘을 ‘아나스타시스(Anastasis)’라고 했다. 그러나 서양 미술에 나오는 모든 ‘부활 이콘’이 아나스타시스는 아니다. ‘예수께서 지성소에 내려가시어 거기에 갇힌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콘을 콕 집어 일컫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서방에서 가령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예수께서 당신 무덤을 열고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당당히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 아직 공식적으로 부활하기 전에 죽음의 깊은 침묵을 깨는 행동을 보이시는 걸 말한다고 하겠다. 다른 한편, 교회 건축에서도 아나스타시스라는 말을 쓰는데, 이 경우, “예루살렘의 예수님 무덤 성당”의 구조를 일컫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 소개하는 프레스코화는 투르키예 이스탄불의 에디르네캅에 세워진 그리스-정교회 성당(오늘날은 모스크로 사용)에 있는 것으로, 1315~1321년 테오도로 메토키데(Teodoro Metochite)가 이 성당에 있는 대부분의 모자이크 작품을 완성한 걸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코라(Chora)의 아나스타시스”로 불린다. 성당 자체는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과 같은 운명을 걸었다. 성당에서 모스크로,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다시 모스크로 여러 번 운명이 뒤바뀌었다.

작품 속에서 예수님은 죽음의 세계 하데스로 내려가서 남자와 여자를 해방한다. 그리스도 우측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후광이 있는 걸로 보아 구약의 의인들로 추정된다. 발아래는 부서진 자물쇠와 끊어진 쇠사슬이 나뒹굴고, 그 위로 역시 부서진 지옥의 문을 밟고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손을 잡아 땅 깊은 곳에서 끌어내고 있다.

이들의 해방은 베드로의 첫째 편지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돌아가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3, 18-19)와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육체로는 인간이 받는 심판을 받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을 따라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4, 6)라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라는 그분의 음성이 천지를 진동하자, 하데스가 모르고 있었다는 듯 능청스레 대답한다. “누가 영광의 임금님이신가?”. 주님의 천사들이 대답한다.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 싸움에 용맹하신 주님이시다!”(시편 24, 7-10 참조). 그 순간 청동문은 산산조각이 나고, 쇠사슬에 묶여 있던 죽은 자들이 해방되었다. 영광의 임금이 사람의 모습으로 들어오니, 하데스의 모든 어둠이 걷히고 빛이 비치었다.

중세 동방교회가 이런 신화적인 면을 빌린 것은, 역사적인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아나스타시스를 그린 예술가는 세속의 임금들을 통해 악마적인 힘/권력을 보았고, 그들의 성문에서 하데스의 문을 보았던 거다. 시편 107, 14-16에는 “그들을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끌어내시고 그들의 사슬을 끊어 주셨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을 위한 그 기적들을. 그분께서 청동 문을 부수시고 쇠 빗장을 부러뜨리셨다.”

그러니까 아나스타시스 이콘은 ‘사흘 후’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승리 이전에 어둠 속에서 그분이 한 행동에 주목한다. 그분은 ‘죽음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먼저 가서 손을 잡고 그곳을 빠져나오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정교회에서 그리스도가 무덤을 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내려가는 걸 부활 이콘으로 제시하는 이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 육신의 소생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분 안에서 부활하는 걸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없애기 위해 돌아가셨고, 지옥으로 내려가 그 문을 부수고 거기에 갇힌 사람을 구하셨다.

아나스타시스 이콘과 그리스도의 지옥 강림은 물리적인 지옥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의 지옥, 죽음과 노화의 그림자와 각종 사슬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분은 그것까지도 쳐부수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분께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죽음의 골짜기를 가더라도 그분을 향한 믿음만 잃지 않으면 된다. 비록 당장 죽음의 그림자가 내 주변을 감싸고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성 실바노가 외쳤던 것처럼, “죽음이 임박했나이다. 저는 이제 죽을 것이고, 지옥의 어둠에 갇히게 될 것이옵니다. 거기서 저는 홀로 불태워질 것이고,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눈물 흘릴 것이옵니다. 나의 주님, 제 마음을 알고 계시는 주님, 당신은 어디에 계시나이까”

아나스타시스를 보면서, 이런 생각과 묵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살아내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을까.

 

김혜경 세레나
부산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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