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운영되어야 교회인가__"나는 신이다"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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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운영되어야 교회인가__"나는 신이다"를 보고
  • 최태선
  • 승인 2023.03.1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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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마침내 <나는 신이다>를 다 보았다. 4편의 교주들의 이야기를 보고 이들이 정말 유치하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다. 그들의 차림을 보고 정신병자이거나 악령 들린 한심한 무당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 모습을 보고 그들은 천국을 연상했다. 이재록편을 보고 난 소감은 이재록이 만일 <나는 신이다>를 보았다면 정명석을 형님으로 모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재록이 정명석을 많이 부러워할 것 같다. 아니 억울해할 것 같다.

그러나 정명석이 부러운 사람은 이재록만이 아닐 것이다. 그 프로를 본 남자들 중에 다수가 정명석이 부러웠을 것이다. 어쩌면 지하에 계신 박정희님이나 김일성님도 그럴지도 모른다. 만일 김정은이 보았다면 기쁨조가 너무 단촐하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들만 죽일 놈들은 아닌 것 같다. 여성인 김기순의 행동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지 않은가. 하긴 이미 서태후 같은 인물을 통해 그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권력이 어떻게 인간 관계를 깨뜨리는가를 볼 수 있다.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권력만이 아니다. 돈 역시 그런 관계를 깨뜨린다. 결국 오늘날 사람들은 진정한 관계를 모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화해라는 단어가 그래서 많이 생각났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분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화해를 통해 복원시키셨다. 그리고 그 관계의 회복이 다른 모든 관계들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입으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그것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혹세무민하는 교주들이 날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런 관계의 회복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를 발견할 수가 없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오늘날 교회는 수직적 관계가 질서로 인정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아무리 시노달리타스(공동합의성)를 이야기해도 평등한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다.

군 시절 하사관들이 생각난다. 훈련기간이 끝나고 소위로 임관하는 날, 준위들은 부대에서 사라진다. 임관한 소위들에게 경례를 안 했다간 치도곤을 치루기 때문이다. 준위들은 하사관들의 장군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들은 장교대우를 해주기도 한다.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그게 다다. 그들은 결코 진급할 수 없고 초급장교가 맡을 수 있는 책임만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게 군대다. 군대는 합법적인 무력적 집단이며 동시에 가장 위계적인 집단이다.

그러나 사실 세상의 모든 조직은 군대와 마찬가지이거나 비슷한 위계를 가진다. 그렇지 않은 집단은 없다. 아무리 민주적이라도 계급이 존재하고 신분의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가족적인 분위기의 회사나 기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는 가족조차 가부장적인 사회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모계사회의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가족조차도 위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는, 아니 예수의 제자들의 사회는 바로 그런 위계가 없는 나라이다. 아무도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오직 그곳의 왕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자매와 형제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뻔한 사실을 실제로는 모른다. 모두가 평등한 자매와 형제의 관계를 교회 안에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반대로 교회야말로 가장 수직적인 관계를,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선을 지니고 있는 계급사회이다. 절대 권력을 정상으로 여기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교주들이 신앙을 팔아 교주가 된 것도 교회가 이런 절대 권력을 당연하게 여기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다름 아닌 이단들의 모판이자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나는 책을 번역하면서 곳곳에서 멈추고 생각을 하게 되고, 너무도 당연한 일들이 사라진 그리스도교를 생각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공동 회의이다. 의도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회의를 통해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을 온전히 참여시켜 목적과 사랑의 일치로 옮기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

이것이 공동회의를 주제로 한 챕터의 결론 가운데 하나이다. 공동체의 다른 모든 사람이 그날의 안건에 찬성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잠시 기다리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기다려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장 좋은 합의에 도달했고, 그것은 모두를 위해 가장 유익한 최선의 결과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교회의 민주적 운영이다. 다수결로 교회를 운영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다수결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다!!

“제안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고 최상의 아이디어로 함께 받아드릴 수 있을 때까지 제안을 구체화한 다음 잠시 침묵을 갖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훌륭한 영적 훈련이다.”

이 간단한 내용에 교회의 결정방식이 들어있다. 의사결정 과정에 모든 사람이 참여한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곧바로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이 많은 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가. 그것은 초기 교회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교회란 커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 안 된다.

그 다음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합의를 도출해낸 경우에도 기다려야 한다. 침묵하며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순간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순간에 말하는 것은 성령만이 아니다. 악령 역시 이 시간을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고 분별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느님의 통치를 이뤄내는 곳이다.

“성령이 주도하는 합의의 과정은 때때로 조금 더 오래 걸릴 수 있지만, 이행은 훨씬 빠르고 결정은 영속성 있는 방식으로 일치한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것이다. 황제는 기다릴 수 없다. 아니 황제는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오늘날 황제가 되어버린 성직자들과 목사들은 교회에서 성령을 말살했다. 하고 싶고,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성서의 말씀을 결론 대신 제시한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교회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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