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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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3.07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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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과 은총 1-2강

 

하느님 나라-세상-교회

교회는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된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와 세상의 긴장 속에 현존한다. 예수가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는 “불완전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거룩함으로 충만하여 세상 속에서 실현된 유토피아”이며, 세상은 “하느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을 위한 싸움터”라고 보프는 말한다. 여기서 교회는 “하느님 나라 그 자체는 아니며, 하느님 나라의 표지로서 세상 안에 그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중재자)”이다.

(1) 신국(City of God)인 교회 : 자족적인 완전한 사회

신국인 교회는 자기완결적인 폐쇄적 교회 유형이다. 이런 교회는 성사, 전례, 성서연구를 통해, 그리고 본당활동을 통하여 자기구원을 위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믿는다. 교황과 주교 등 교계제도가 조직적 핵심을 이루는 구조여서, 필연적으로 ‘성직자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어떤 결정도 성직자 없이 내려질 수 없다.

이 교회에서 ‘세상’은 어떤 신학적 가치도 없다. 세상은 다만 교회의 중재를 통해서만 은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개종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특히 정치의 영역은 ‘오염된’ 공간이기에 기피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되어, 국가처럼 ‘완벽한 사회’로 여겨진다. 이런 교회는 세상의 간섭이나 훈계를 들을 필요가 없이 완전하므로, 교회는 가톨릭신문, 가톨릭대학, 가톨릭신용조합 등 ‘가톨릭’으로 표출되는 이름으로 사업을 벌인다. 그러나 실상 교회의 운영방식은 세상의 운용방식을 복제하면서 자신을 세상에서 격리시킨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평화방송'(PBC)을 최근에 '가톨릭평화방송'(CPBC)로 개칭한 것은 참 역설적이다.  

(2) 어머니와 교사인 교회 : 제국주의적 교회

식민지를 통해 교회를 이식한 대부분의 교회는, 교회의 필요와 안전을 보장해주는 국가와 맺은 계약이나 협정에 의존하는 ‘제국주의적 또는 식민지 교회’가 있다. 교회는 ‘교계제도’와 동일시되며, 교회는 국가를 통치하는 지배계급과 연대하며, 이 계급을 중심으로 대학, 교회기관, 정당 따위를 세운다.

이 교회는 어머니처럼 상류계급의 자녀들을 교육시켜 이들이 가난한 사람을 해방시킬 수 있도록 독려한다. 이들은 부유층의 기부를 통해 방대한 자선사업을 벌이는데, 진정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나 “가난한 사람의 교회”로 가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되고자 한다. 이들에게는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의 위계 안에서 합법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이 중요하며, 성직자들 안에서 예언자적 증언을 찾아보기 어렵다.

교계제도를 통한 권력의 집중화는 교회가 다른 정치권력과 연대하는 것을 매우 쉽게 만든다. 다만 프랑스대혁명 때처럼,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이나 전체주의 때문에 민중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억압을 받을 때만 위기에 봉착한다. 그럴 때마다 신자들은 교계제도로부터 ‘중립을 지키라’는 명령을 듣는다.

이럴 때 교회는 스스로 ‘비정치적’임을 강조하면서 책임을 모면하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교회는 권위주의 정권의 정통성을 문제 삼지 않고 비교적 편안한 관계를 맺는다. 이런 교회는 교회의 활동범위를 제의실로 축소시키기 때문에 정치권력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3) 구원의 성사인 교회

교회는 보편적 구원의 성사이기 때문에 ‘세상’ 역시 교회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구원의 성사’로서 기능해야 하는 교회는 더욱 정의롭고 우애 있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투신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영감을 부어준다. 교회는 더 이상 국가권력에 직접 호소하지 않고 과학적, 기술적, 정치적 권력을 지닌 민간단체에 호소하기 시작한다.

교회의 언어는 자본주의의 악습과 가난한 이들의 소외문제에 개입하며 예언자적 태도를 지닌다. 그러나 교회는 대안적 전망보다는 여전히 사회의 지배층이 받아들일 만한 ‘체제 내 개혁’을 주장한다.

교회는 세상을 ‘지금’ ‘여기’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하느님 활동의 장소로 이해한다. 교회는 이 세상과 화해하고 동반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시도했던 교회상이며, 예전에 반(反)교회적이었던 지식인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교회는 가진 사람들의 시각에서 가난한 사람을 바라본다. 가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돕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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