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 이방인처럼
상태바
교회 안에서 이방인처럼
  • 최태선
  • 승인 2023.03.06 16: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태선 칼럼
Detail from The Temptation of Christ, by J. Kirk Richards
Detail from The Temptation of Christ, by J. Kirk Richards

어제 한 분과 전화통화를 했다. 내가 지난 2월 한 달 동안 글을 안 올린 이후 처음 한 통화이다. 그분은 날마다 내 글을 읽는다. 오래도록 그래 왔다. 그런데 내가 글을 안 올리니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말이 기억난다.

“이젠 <뉴스엔조이>의 글을 읽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나 스스로도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전에는 <뉴스엔조이> 기사를 읽고 공감이 되는 경우도 있고, 배우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교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있는 창으로서의 역할만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유명한 대형교회에서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순간적으로 느꼈던 느낌이 그 글의 모티프가 되었다.

이제 나는 제도권 그리스도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어쩌면 내가 그것을 의도했는지도 모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 교회에서 예배드리기를 멈춘 것에서 이미 그 일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런 나를 주님이 인도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할 것이다.

내가 정말 안티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이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Yes'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예수의 제자로 생각한다면 대답은 분명하게 ’No'이다. 단순히 ’No'가 아니라 그보다 강력하게 아니 진지하게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대형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감동에 젖어 교회 문을 나오던 사람이었다. 그때의 느낌을 아직도 내 몸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하고, 찬양을 드리고 감동하고, 나도 모르게 내 눈으로 주르륵 눈물이 흐르던 그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달라졌다. 이제 나는 그런 교회,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나는 더 이상 그런 교회에 다닐 수 없고,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할 수 없다. 물론 그렇게 된 나는 완전히 그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방인이 되었다. 어제 번역하던 부분의 한 대목이 내 기억에 남는 이유이다.

“우리의 경우, 우리는 어떤 민족적 경계를 넘어 이동하지 않았지만, 성령이 이끄는 이 모든 변화로 인해 우리 자신은 고향에서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생생하게 감지하고 있다. 그가 찾아낸 단어는 ‘이방인’ 혹은 ‘외계인’으로 번역될 수 있는 ‘alien’이다. 그 단어가 얼마나 생생하게 느껴지는지 내가 전에 교회에 가서 흘렸던 눈물이 다시 흐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웠고 너무 고마웠다. 그러나 그와 내가 다른 것은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aliens'로 복수형이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인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사실 내 경우는 우리 식구들조차 나와 같은 변화를 겪지 않았다. 아니 세상 천하에 나만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엘리야도 그랬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이런 외로움은 심각하다. 어제 내 글에 한 분이 내 글이 예레미야 같다는 댓글을 달아주었다. 실감이 난다. 나는 그런 말을 하게 되었다. 그분은 내 글을 제대로 읽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 전부터 내가 예레미야를 마음에 두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엉뚱한 일이었다. 모두가 평화를 말하는데 그는 그것이 거짓 평화임을 말해야 했고, 모두가 자신들의 하느님이 틀림없는 하느님이라고 말하는데 그만 그 하느님이 가짜 하느님이라고 말해야 했고, 무엇보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반목하고 불화해야 했다. 성전 총감독은 그를 일컬어 ‘마골밋사빕’이라고 불렀다. ‘마골밋사빕’이란 사방으로 엄습하는 두려움을 의미한다. 예레미야가 성전총감독인 바스훌을 향해 한 말이지만 결과적으로 바스훌을 비롯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예레미야야말로 진짜 ‘마골밋사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생각을 해보자. 누가 진짜 ‘마골밋사빕’이 되겠는가. 당연히 바스훌이어야하지만 실제로는 예레미야가 ‘마골밋사빕’이 된다. 참으로 오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예레미야에게는 사방으로부터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는 착고에 매여 구덩이에 갇혔다. 영락없다. 예레미야가 ‘마골밋사빕’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예레미야는 외로움을 넘어 두려웠을 것이다. 마골밋사빕은 하느님의 샬롬을 경험할 수도 가질 수도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샬롬이 있었다. 그렇다. 샬롬의 유무야말로 진정한 ‘마골밋사빕’을 가르는 시금석인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사실을 주장할 수 없다. 모두가 자신을 일컬어 ‘마골밋사빕’이라고 하는 판에 자신에게 샬롬이 있음을 주장해보라.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게 된 것은 예레미야만이 아니었다.

“그러자 크나아나의 아들 치드키야가 미카야에게 다가가서 뺨을 치며 말하였다. “주님의 영이 나를 떠나 어느 길로 너에게 건너가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냐?”(1역대 18,23)

미카야 역시 시드기야에게 빰을 맞고 조롱을 당해야 했다.

지독한 아전인수라는 생각이 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 생각이 모든 것을 가른다. 지난 2월 한 달 동안 나는 글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주님이 내게 주시는 생각들을 적어놓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공개하지 않았을 뿐 나는 며칠이 지난 후 예전처럼 매일 글을 썼다.

나는 이제 좀 더 분명하게 글을 쓸 것이다. 이십 년 전 조용기 목사에 대한 부정적인 글을 쓸 때 사실 나조차 망설였다. 조용기 목사가 하는 일이 성령의 역사인지 분명하게 판단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후 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조용기 목사의 실체를 보았다.

그렇다. 예언자라는 것은 이렇게 시간을 앞서 가기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언자로서 나의 사명을 등한시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예레미야처럼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주님은 내가 그럴 수 없게 만드신다. 또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도록 끊임없이 깨달음과 글 자료들을 제공하신다.

그래서 이제 나도 바울 사도와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

“조금 있든 오래 있든, 나는 임금님만이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이들이 이 사슬만 빼고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느님께 기도합니다.”(사도 26,29)

가르멜산의 엘리야도 생각난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 18,21)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자신이 있는 곳에서 아직 ‘이방인’처럼 되지 않았다면 그것을 사모하게 되시길 바란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