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긴 조명, “이 신문은 평신도들을 위한 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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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긴 조명, “이 신문은 평신도들을 위한 신문입니다.”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08.18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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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코넬은 1962년 영원히 가톨릭일꾼에 왔다. 처음 2년 동안은 일꾼신문의 편집자로 있었다. 1964년 그는 클리브랜드에 있는 가톨릭일꾼 창립자를 부모로 두었던 모니카 라이바와 결혼했다. 톰과 모니카의 두 아이들은 오늘날 가톨릭 일꾼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고 있다.

톰은 가톨릭 평화 동지회를 창설했는데, 이 단체는 일꾼과 화해동지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특별한 평화주의 기관이다. 1980년대에 톰과 모니카는 코네티컷트의 워터베리에서 가톨릭일꾼 집을 운영했고, 1993년에는 뉴욕시의 말보로에 있는 가톨릭일꾼 농장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은 뉴욕의 일꾼 집들과 긴 협의관계를 계속하고 있으며, 지금도 시 원로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지난 50년 동안의 삶과 도로시 데이 그리고 신문과의 관계에 얽힌 추억들을 내 놓는다:

❧ 나는 도로시 데이를 알고 있었다. 자서전 「긴 외로움」을 통하여 그를 첫 번째 만났다. 1952년 가을이나 1953년 초였을 것이다. 그의 자서전이 발간 된지 얼마 안 되었던 때였다. 나는 훼어휠드 대학교의 일학년 학생이었다. 자서전 책은 나의 조건에 대해 말했다. 어떤 질문에는 답변이 나왔고, 다른 질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마침내 나는 말했다, “난 일꾼으로 가서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어.” 그래서 난 시내로 들어가는 기차를 탔고, 바우어리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며 걸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일꾼 앞에 와 있었고 도서실로 뛰어 올라갔다. 그곳에는 금요일 만남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의자에는 사람들이 꽉 찼고, 다른 이들은 바닥에 앉거나 뒤에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 방의 한 구석에 한 여성이 다리를 꼬고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 때 누가 말하고 있었는지,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없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들은 얘기를 좋아하지 않을 때 그의 뜨게질 바늘들이 서로 부딪쳐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좋았을 때는 조용하고 뜨개질 하는 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그는 골격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알몬드 색의 눈을 지녔다. 회색머리를 땋아 왕관처럼 머리 위에 얹어 놓았다. 어느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도로시 데이야.”

질문하고 답변하는 시간에, 어떤 사람이 일어나 사람들이 기본적인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 것에 관해 말했다. 그러나 도로시는 말했다, “안전. 왜 안전에 대해 말합니까? 오늘 밤 이곳의 젊은 사람들은 안전에 대해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일을 젊은이들 이외에 누가 할 것입니까?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면 위대한 일들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일을 위하여 보물을 옆으로 밀어 놓을까요?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십시오. 들의 백합꽃을 보십시오, 그것들이 어떻게 자라나는 가를.”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압도되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 도로시는 나를 사로잡았다. 그 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에서 일꾼으로 가곤했다.

나는 도로시를 알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세상을 열어주었다. 참으로 가장 중요한 흐름들을, 신비적인 흐름들을 보여 주었다. 이것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도로시는 그것과 만나게 해 주었다. 나는 그것에 참여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무엇을 청하겠는가?(멈춤) 얼마나 감사를 느끼는지 모른다. 그래서 당신은 울게 된다(긴 멈춤).

내가 일꾼에 완전히 오게 된 것은 수년이 지난 후였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신문의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도로시에게 내가 가고 있다는 편지를 썼다.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고 말했다, “월요일 아침에 오면 좋겠어요.” 그는 그날 오는 것이 가능하겠냐고 묻지 않았다. 혹은 그 날이 나에게 편하겠냐고 묻지도 않았고, 오고 싶으냐고 묻지도 않았다. 도로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월요일 아침에 오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 다음 날 아바나로 가는 비행기를 탑니다. 그러니 월요일 아침에 일꾼에 있을 거지요?”

그래서 나는 침낭을 걸머지고 뉴욕으로 날아갔다. 도로시는 크리스티가 175번지에 있는 일꾼 집 3층에, 첫 번째 창문 바로 옆에 내 책상을 마련해 주었다. 3층의 앞쪽 벽은 바야흐로 길 쪽으로 허물어지려고 했다. 참담한 지경이었다. 너무나 낡고 덜컹거리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조리처럼 새고 있었다. 이어 도로시는 한 묶음의 교정쇄와 교정원들을 위한 안내 책자를 주었다.

“이걸 읽어 보세요. 당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일러 줄 겁니다. 당신은 신문을 발간하게 될 겁니다.” 나는 고등학교 이후로 이런 일을 해 본적이 없었다.

“난 이런 일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요!”

도로시는 이렇게 말했다, “아, 걱정하지 말아요. 인쇄기가 당신에게 다 알려 줄 겁니다.”

갑자기 난 여기에서 도로시와 직접 일을 함께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도로시와 같은 건물 안에 살고 있다니. 나는 아침에 도로시의 집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원고에 대하여 말을 할 것이었다. 실제로 내가 신문을 냈던 2년 동안에, 도로시는 총 22호 중에서 오직 세 번만 참여했을 뿐이었다. 도로시는 거의 그곳에 없었으며 나에게 원고편집을 맡도록 했다. 물론, 내가 도로시에게서 무엇인가 원고를 받으면 신문에 내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때때로 나는 그의 원고 문장을 고치기도 하고 잘못된 장소 이름을 수정하기도 했다.

도로시는 글을 쓰는데 있어 장인이었다. 그처럼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의 솜씨는 글쓰기에서 빛났고, 따라서 그는 글을 실제로 썼으며 최고로 노력할 때에 그 글은 황홀할 정도였다. 도로시의 글은 사람을 집중시키게 하는 매력이 있었고 그것도 오랫동안 빠지도록 만든다. 나는 1952년부터 지금까지 그의 자서전인 <긴 외로움>을 얼마나 많이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도로시를 위하여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일을 했다. 나는 그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것을 더 큰 평화와 정의운동과 연결하면서 일꾼신문과 운동의 정책에 반영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도로시가 썼던 글을 읽고 또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통해서였다. 도로시는 사람들에게 바른 것을 지적해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맑시즘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질 때에는 그런 방향에서 필요한 수정을 제시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부르주아 방향으로 나가면, 도로시는 그에게 반대방향으로 나가도록 밀었다. 보다 계급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이해하도록 촉구했다.

우리는 싸움도 많이 했다. 처음으로 도로시가 나를 꾸짖은 때는 두 번째 신문을 낼 때였다. 그것은 1962년 10월이었다. 나는 신문에 세 신부들에 대한 기사를 모아 놓았다. 도로시가 말했다, “이 신문은 평신도들을 위한 신문입니다.” “한 두 명의 사제들에 관해서는 괜찮지만, 세 명은 너무 많아요.” 그는 반성직주의를 주장하진 않았지만, 피터 모린의 관점을 갖고 있었고 나도 그 생각이 적절하다고 여겼다. 그것은 신부들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사회문제를 알아듣는 독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내가 실수를 할 때면 –예를 들면 피터 모린의 기일에 가까운 신문을 낼 때 그의 <쉬운 글들> 중에서 인용글을 싣지 않으면– 도로시는 처음엔 화를 냈지만, 늘 실수를 바로 잡아주었다.

나는 1960년대에 일꾼운동과 다른 평화운동 사이에 다리 역할을 많이 했다. 도로시는 다른 그룹들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그룹들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알고 싶어했다. 도로시는 참으로… 지적이고 잘 양성된 여성이었으며, 정치에 관해서 복합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도로시는 … 그가 신뢰했던 사람들의 조언없이 혼자서 어떤 일들을 다룰 수 없었다. 정치, 철학 분야에서 어떤 때 도로시는 모순을 보일 때가 있었다. 물론 도로시가 항상 고수했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부차적인 측면에서 일관성이 부족할 때가 있었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내 능력과 충실함을 보였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그저 도로시 데이의 대변인에 불과하네요. 당신 자신의 생각과 권리는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그러면 나는 말합니다, “도로시는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지금 나는 도로시의 입이 되고 싶어요. 내가 좀 더 성숙하고, 좀 더 경험하고, 더 잘 이해하고, 도로시의 영적인 깊이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그냥 놔두세요.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도로시가 나에게 의지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 때의 삶은 그랬다(멈춤). 우리 모두는 도로시를 너무나 그리워한다. 우리는 그를 사랑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항상 그가 했던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비범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인간의 시도 자체가 기본적으로 희극이며 고전적 의미의 비극이 아니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도로시 데이처럼 행동의 모형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전하고 싶은 모든 것이다(긴 멈춤). 당신에게 감사를 표한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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