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제국교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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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제국교회의 탄생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2.1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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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튀르키예 여행기-2
아시아 하이웨이의 끝점인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보스포러스 해협은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분기점이다. (이하 사진=한상봉)
아시아 하이웨이의 끝점인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보스포러스 해협은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분기점이다. (이하 사진=한상봉)

경부고속도로 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표지판이 있다. ‘아시아 하이웨이(Asian Highway)’. 아시아 하이웨이는 아시아 대륙 31개국을 연결하는 국제 자동차도로망으로, 길이가 14만㎞라는데, 31개국에 있는 기존 55개 노선의 도로를 국경을 초월해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가운데 한국을 관통하는 노선은 일본 도쿄를 출발해 후쿠오카[福岡]-부산-서울-평양-신의주-베이징-베트남-태국-미얀마-인도-이란-튀르키예 등으로 이어진다. 일본과 한국은 선박으로 차량을 운송하되, 해저터널 노선도 논의되고 있다.

아시아 하이웨이는 아시아와 유럽의 경제·문화 교류를 목적으로 1959년 국제연합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현재의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가 아시아고속도로프로젝트(AHP)를 채택한 뒤, 1968년 AHP 사무국이 신설되면서 공식 사업으로 출범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아시아 하이웨이의 종착지가 튀르키예라는 데 있다. 튀르키예, 그중에서도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로 두고 유럽 지역과 아시아 지역에 걸쳐 있는 도시다. 다시 말해, 이스탄불은 유럽이면서 아시아 대륙에 속한다. 그래서 부스벡 프랑스 대사는 “이스탄불은 세계의 수도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라고 표현했다.

이스탄불은 비잔틴 제국을 거쳐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무려 1600여 년 동안 세계의 중심이 되어 왔으며, 세계문화유산의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라고스’란 이름으로 불리던 이 지역의 부족장이던 그리스 사람 비자스가 이끄는 메가라족이 골드혼이 있는 사라이부르누에 정착하면서 그 부족장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움’이라는 도시를 지었다.

 

골드혼과 보스포러스해협의 물이 만나 마르마라해를 거쳐 에게해로 흘러가는 시작점인 사라이부르누는 배꼽처럼 볼록 나온 곶인데, 존갱이 류의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로마의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설에 따르면, 비자스가 델포이 신전에서 어디에다 도시를 세우면 좋을지 물었을 때 ‘눈먼 사람들이 사는 반대편’에 세우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전한다. 여기서 눈먼 사람들의 도시는 그리스 식민지였던 칼케돈(지금의 카드쾨이)이고, 그 건너편이 톱카프 궁전과 소피아 성당이 나중에 자리한 사라이부르누다. 이곳은 보스포러스해협 입구에 있기 때문에 흑해로부터 마르마라해를 지나 에게해로 지나는 선박을 감시할 수 있었고, 비잔티움 사람들은 보스포러스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지니고 통행세를 받았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된 뒤에 로마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6년 동안 도시를 네 배의 크기로 재건해 330년에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라고 이름지어 로마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그 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개명했다.

한편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은 뒤에 로마 제국은 그 아들들에 의해 다시 동·서로 갈리게 되었는데, ‘로마’ 중심의 서로마는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476년에 멸망하였고,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058년간 존속되었다. 여기서 동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동로마가 로마의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의 나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서부 로마가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동로마는 라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던 최후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가 사망한 565년 이후에는 그리스어만을 공용어로 사용했다.

 

보스포러스 해협 양쪽 해안에는 작은 숲과 카페, 호텔들이 줄지어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 양쪽 해안에는 작은 숲과 카페, 호텔들이 줄지어 있다.

제국교회, 불행의 시작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고 그리스도교를 용인했다는 것은 지난 300년 동안 박해 받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행운이었으나, 독일 신학자 칼 라너의 표현대로 ‘제국교회’라는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 로마 서부를 두고 싸우기 전에 꿈에서 보았다는 ‘크리스토스’(χρηστός)의 그리스어 처음 두 개의 철자 Ⅹ와 Ρ를 교차시킨 상징을 자신들의 병사들 방패에 부착하고 전투에 나가서 승리를 거두었다. 락탄츠는 “하느님의 손이 전장에서 위에서부터 내려왔다.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막센티우스 자신도 다리 위로 달려갔으며, 탈주병들의 무리들에 의해서 붙잡혀 티베르 강에 던져졌다. 그 신물나는 전쟁은 결국 끝이 났다”고 전한다.

그후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신권(神權)의 군주로서 지상에 대한 하느님의 대행자이며, 교회의 ‘세속적인 팔’로 자임했다. 그는 주교들에게 “하느님은 여러분들을 교회의 내부적인 사업들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주교로 세워놓았습니다. 그러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십중팔구 외부적인 사업들을 위한 주교로 명령을 받았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는 315년에 그리스도인들이 언짢아하는 십자가형을 폐지했으며, 321년 ‘태양의 날’이었던 주일을 법정공휴일로 지정했으며, 교회에게 유언장 인수 집행권한을 부여했다. 독신을 규제하는 아우구스투스의 법은 폐기되고, 교회의 사법권이 주교들에게 주어졌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집정관이나 법정 검찰 등 공무원이 될 수 있었고, 심지어 코르도바의 오시우스 주교는 황제의 종교관계 자문관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주교에게 라테란 궁전을 제공했고, 바티칸 구릉 위에다 성 베드로 기념성당을 건립하도록 결정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우대 받고 이교도는 홀대 받게 된다. 그리고 태양신의 상징들은 점차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대치되었다. 이런 점에서 ‘솔 인딕투스’(Sol invictus, 이길 수 없는 태양)라는 아폴로의 태양예배 축제인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생일로 지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동부를 차지하고 있던 리키니우스마저 324년 11월 8일에 비잔티움 맞은 편 동쪽 포구 크리소폴리스(지금의 위스퀴다르)에서 물리치면서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는 즉시 비잔티움으로 로마의 수도를 옮기고 ‘콘스탄티노플’이라고 이름지었다. 군사정치적으로 로마를 통일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의견과 분열상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 당시 제국교회 안에서 지역교회마다 조금씩 다른 신앙고백문(신경)을 사용해 왔는데, 제국의 일치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신앙고백문’이 필요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한 하느님-한 황제-한 제국-한 교회-한 신앙’이라는 도식을 요구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오리게네스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한 분’이라는 입장에서, 말씀(로고스, 그리스도)은 성부이신 하느님과 달리 피조물에 불과하며, 성부에 의해 성자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말인데, 강생과 구속신앙에 사로잡혀 있던 전통적 신학에 타격을 가하는 내용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주교가 즉각 반격에 나서며 아리우스를 단죄하고 출교 명령을 내렸으나 아리우스는 오리게네스에게서 영향을 받은 동방교회 주교들의 지원을 받아 버티고 있었다.

제국을 종교적으로도 통일하려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문관 오시우스 주교의 손에 편지를 들려서 아리우스에게 보냈다. “아리우스, 당신은 가져서는 안 되는, 또는 그것을 가졌다 해도 알려서는 안 되는 생각을 경솔하게 퍼뜨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백성들 사이에 친교가 깨지고 분열이 발생했다고 경고했다. 이어 그리스도론에 관한 논쟁을 두고 “헛된 논란들의 어미인 무위도식에 의해 만들어진 그런 탐구들은 정신의 훈련에 잘 사용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서 거두어져야 하고, 공적인 집회 안에서 가볍게 던져져서는 안 되며, 또는 백성들의 귀에다 분별없이 말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전했다. 그러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좌중에선 폭소가 터져나왔다. 그리스인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런 신학논쟁과 같은 ‘정신훈련’이 실용적인 로마인 황제에게는 ‘무위도식’으로 비추어진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

황제가 주관한 니케아 공희회

논쟁에 익숙한 알렉산드리아와 그리스인들의 태도에 약이 오른 오시우스 주교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제국의 통합에 필수적인 교회일치를 위해 ‘아리우스주의’라는 걸림돌을 치울 공의회를 열도록 제안했다. 결국 교회 역사상 첫 번째 공의회는 325년 황제의 명령으로 니케아에 있는 황제의 별궁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완전한 세계공의회가 아니었다. 250여 명의 주교 가운데 116명은 소아시아(터키)에서 왔고, 19명은 시리아에서, 19명은 팔레스타인에서 왔지만, 서방의 주교들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케아의 제국 궁전 거실에 주교들과 수행원들이 양편에 앉아 있는 가운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맨 끝에 놓인 황금옥좌에 앉았다. 지중해변 카이사리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는 이 장면을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황제는 마치 하느님이 보낸 사람과도 같이 황금색 옷을 입고, 값진 보석들로 뒤덮여서 나타났다. 그는 키가 컸고, 두드러졌으며, 아름다웠고, 위엄이 있었다. 그런 대인의 풍모를 가지고서도 그는 조심스러운 겸손과 종교적인 겸비를 보여주었다. …… 그가 자리를 잡자마자 모든 주교들이 다 좌정했다.”

회의를 열면서 황제는 “오, 하느님의 귀중한 일꾼들이여, 주님이시고 모든 이들의 구세주이신 분의 신실한 종들이여, 모든 불일치가 사라지도록 그리고 여러분들의 논쟁이 평화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지도록 일하십시오”라며 짐짓 겸손하면서도 강력하게 입장을 드러냈다. 이날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주교들 앞에서 본인도 그리스어를 할 줄 알면서도 제국의 공식언어인 라틴어로 연설했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했다. 결국 이 공의회가 종교적 사안이라기보다 ‘국가의 사업’임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황제는 공무원을 소집하듯이 주교들을 소집해 ‘불일치’를 해소하는 공무를 수행하도록 지시한 셈이다.

여기서 “예수는 그 실체(우시아 ousia)가 하느님 아버지와 일체(호모우시우스 homoousios)이므로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라는 ‘니케아 신경(信經)’이 확정되었다. 정양모 신부는 이 신경에는 “성경에는 전혀 없는 지극히 추상적인 낱말들로 예수님의 영원한 신성을 단언한다”며 “체험적 그리스도론이 사변적 그리스도론으로, 상승 그리스도론이 하강 그리스도론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자세히 보면, 이 신경에는 예수의 강생과 수난,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만 언급할 뿐 예수의 삶은 쏙 빼버렸다. 알다시피 우리가 통상 전례에서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도 예수의 삶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제국교회 이후에 신앙이 추상화 되었음을 반증한다.

사변적인 교리논쟁의 장이 된 공의회

니케아에서 확정한 신앙고백문 말미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느니, 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느니, 무에서 또는 다른 본질이나 실체에서 생겨나셨다느니라고 말하는 자들, 하느님의 아들은 변하거나 달라지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 이런 무리들을 보편적이요 사도적인 교회는 파문한다”고 적었다. 어느 주교도 여기에 “나는 기록된 대로 믿습니다”라고 서명하기를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결국 서명을 거부한 이집트인 마르마리카의 테오나스 주교와 프톨레마이스의 세쿤두스 주교만이 아리우스와 더불어 즉석에서 출교(出敎)되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니케아 신경은 사실상 흐리멍텅한 의견과 소심한 침묵의 대가로 토론 없이 졸속으로 아리우스의 주장을 단죄했다. 이후로 공의회는 교리논쟁의 장이 되었고, 징계를 알리는 법정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의 신앙고백을 되풀이하는 신학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신앙진리에 대한 탐구의 권리’는 오랫동안 박탈되었다.

공의회가 폐막되면서 황제가 공의회 교부들에게 화려한 연회를 베풀었다. 에우세비우스는 황제를 모시고 회식하는 영광에 감지덕지한 나머지 세상의 연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왕국의 잔치려니, 생시가 아니고 꿈이려니 생각된다는 송사를 늘어놓았다. 주교들은 눈부시게 도열하고 있는 그들에게 무기들을 내밀면서 경례를 하는 친위대를 보면서 “자기들이 벌써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황제는 주교들에게 선물을 쥐어 주고, 가난한 이들과 사제들을 위해 밀을 배급할 수 있는 권리증을 하나씩 주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주교들의 손발을 묶어 교회를 황제에게 갖다 바친 공의회였다. 황제는 공의회 의결사항을 국법으로 선포하고, 이후로 (서방교회가 교황 중심이듯이) 동방교회는 황제 중심의 교회로 전락했으며, 사도들과 예언자, 순교자들과 증거자들 중심의 교회가 원로원 의원과 영주급 주교들 중심의 교회로 변모했다. 바야흐로 정양모 신부의 말마따나 “공권력으로부터 박해 받던 민중교회가 공권력의 힘을 빌려 민중을 지배하는 성직교회로 바뀌었다.”

그러나 정작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공적으로 그리스도인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337년 5월 죽기 전날 밤에 가서야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단죄했던 아리우스파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에게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리는 다만 제국 통치의 방편일 뿐이었던 셈이다.

 

이레네 성당. 콘스탄티누스는 귀족과 특권층의 음모로부터 자유롭고, 지리적으로는 방대한 영토의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서쪽으로 치우친 로마를 대신하기 위해 순수한 신앙도시로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건설했다. 여기에 성 이레네 성당을 지었으며, 이후 소피아 성당 등을 지어 성모 마리아께 봉헌했다. 이레네 성당은 오스만제국 당시에 병기고로 사용되다가 현재 콘서트홀로 사용되고 있다.
이레네 성당. 콘스탄티누스는 귀족과 특권층의 음모로부터 자유롭고, 지리적으로는 방대한 영토의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서쪽으로 치우친 로마를 대신하기 위해 순수한 신앙도시로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건설했다. 여기에 성 이레네 성당을 지었으며, 이후 소피아 성당 등을 지어 성모 마리아께 봉헌했다. 이레네 성당은 오스만제국 당시에 병기고로 사용되다가 현재 콘서트홀로 사용되고 있다.
할례를 받은 이슬람 소년들을 이레네 성당 앞에서 만났다. 무슬림들은 생후 8일째, 또는 생후 40일재나 5~7세 때 할례를 받는데, 할례일이 공고되면 터번과 새옷으로 단장하고 많은 친지들이 축송을 하는 가운데 마취 없이 간단한 수술을 행한다. 남자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으로 이날 소년들은 갖가지 선물을 받는다. 
할례를 받은 이슬람 소년들을 이레네 성당 앞에서 만났다. 무슬림들은 생후 8일째, 또는 생후 40일재나 5~7세 때 할례를 받는데, 할례일이 공고되면 터번과 새옷으로 단장하고 많은 친지들이 축송을 하는 가운데 마취 없이 간단한 수술을 행한다. 남자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으로 이날 소년들은 갖가지 선물을 받는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제국교회는 니케아 신경을 바탕으로 교리를 확립해 가야 했는데,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국교로 확정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0년에 반포한 종교칙령 <모든 민족>을 통해 제국의 모든 민족들에게 로마 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대변하는 ‘거룩한 삼중성 안에 계시는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인 신성’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했다. 결국 이단들을 단죄하고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 교리처럼 ‘성령과 하느님의 본질이 동일함’을 천명하기 위해 성 이레네 성당에서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레네 성당은 십자가 형태의 성당으로 4세기 초까지 아프로디테의 신전이었다가 성당으로 개조됐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0년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발탁해 381년 공의회를 주도하도록 했다. 150여 명의 동방교회 주교들만 참석한 공의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확정했다. 니케아 신경에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에게서 좇아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을 받으시고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란 구절이 첨가된 것이다. 이를 통해 삼위일체 교리논쟁이 일단락되었는데, 동방교회는 성령이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좇아난다고 이해하였고,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난다고 해석했다.

결국 서방교회에서 589년 톨레도 교회회의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자신들의 표현인 ‘성자에게서(Filioque)’를 삽입함으로써 큰 문제가 발생했다. 서방에서는 신앙의 해석이라고 생각한 반면 동방에서는 신앙의 변조라고 여겼던 것이다. ‘성자에게서’가 삽입된 이 신경은 서방교회에서는 점차 보편화 되어 마침내 1014년 베네딕토 8세 교황 때 로마에서도 채택돼 1054년 동·서방교회 대분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교리논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욥 수도원의 노사제 에우티케스가 ‘예수는 신성과 인성 두 품성을 지니신 것이 아니라 한 품성만 지니셨다’는 단성론을 주장했다. 논란이 빚어지자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451년 보스포러스 해협 건너편 아시아 지역에 있는 칼케돈 지역에 있는 성녀 에우페미아 성당(지금의 하이다르파사 기차역)에서 통상 4차 공의회를 열어 “같은 분이 신성을 온전히 지니시고 같은 분이 인성도 온전히 지니시니 같은 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요, 사유하는 영혼과 육신을 갖추시어 참으로 사람이시다”라는 예수의 ‘양성교리’를 선포했다. 여기서는 아예 예수의 강생과 인성만 거론되었다. 칼케돈은 고대인들이 '눈먼 사람의 도시'라고 불렀다는데, 삶이 거세된 자리에 '교리'만 남은 셈이다.  

 

하이다르파사 기차역. 칼케돈 공의회가 열렸던 성녀 에우페미나 성당은 이제 기차역이 세워져 수많은 터키의 무슬림들이 메카와 메디나로 순례를 떠나는 시발역이 됐다. ⓒ한상봉 기자
하이다르파사 기차역. 칼케돈 공의회가 열렸던 성녀 에우페미나 성당은 이제 기차역이 세워져 수많은 튀르키예의 무슬림들이 메카와 메디나로 순례를 떠나는 시발역이 됐다. 

삶이 거세된 자리에 교리만 남았다

한스 큉은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분도출판사, 2002)에서 이런 공의회 신학에서 비롯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소박하고 알기 쉬운 복음서에게 멀어지고 복잡한 삼위일체 사변이 생겨났다. ‘세 분이 어떻게 하나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성부는 “낳아지지 않았음” 성자는 “낳아졌음” 성령은 “좇아나옴”이라는 동사만으로 형식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공의회에서 선포한 ‘교리’에 대한 지적 승인이나 믿음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또한 신앙이 민중에게서 친근한 선포에서 멀어졌다. 삼위일체론은 극히 높은 지적 수준을 요구하는 개념의 유희나 일종의 ‘삼위일체 고등수학’이 되어 신자들에게 납득되지 않아도 ‘신비’ 로 믿으라고 강요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전례 안에서는 여전히 기도가 ‘삼위일체’에게 바쳐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바쳐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장 큰 불행은 공의회의 결정이 (진리에 대한 탐색보다는) 교회정치의 역관계에 따라서 결정되면서, 유례없는 교회분열과 이단자 박해를 불러왔다는 점이다. 비폭력 평화 건설의 설교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을 달리 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살해했다. 아리우스파는 교회에서 축출되었고,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는 많은 교회들이 전체교회에서 배제되었다. 이집트 콥트 교회 뿐 아니라 아르메니아 교회와 게오르그 교회도 나중에 단성설을 따랐으며, 시리아의 네스토리우스 교회 역시 이단으로 단죄 받았으나 페르시아, 인도, 중국으로 퍼져 나갔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차량이 붐벼서 막히는 정체 구간에서 우리처럼 냉커피나 뻥튀기가 아니라 '장미꽃'을 판다. 터키 남자들 퇴근 길에 꽃다발을 사서 아내에게 선물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차량이 붐벼서 막히는 정체 구간에서 우리처럼 냉커피나 뻥튀기가 아니라 '장미꽃'을 판다. 터키 남자들 퇴근 길에 꽃다발을 사서 아내에게 선물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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