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국수집, 이십 년의 세월의 놀라운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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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국수집, 이십 년의 세월의 놀라운 은총
  • 서영남
  • 승인 2023.02.0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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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남의 민들레국수집 일기
사진=서영남
사진=서영남

"민들레국수집이 1930년대 미국의 가톨릭 운동에 불을 지핀 '환대의 집'처럼 되기를 바란다.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갇힌 이들을 위로하며, 집 없는 이들을 맞아들이는 가난한 이들의 안식처가 되기를 말이다. 그의 소망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예수처럼 환대하고, 그들 가난한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이들이 회개의 은총을 얻게 되는 그날(카이로스)에 대한 희망이 민들레국수집이 날리는 홀씨를 타고 이 땅 곳곳에 뿌려지기를 기다려본다."

2003년 월간 <생활성서> 12월호에 실린 민들레국수집 이야기의 말미에 있는 글입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스물두 살 때 천주교 수도원에 들어가서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수도원에서 25년을 살다가 가난한 사람들 틈에서 사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습니다. 빈털터리였는데도 가진 것을 전부 털었더니 삼백 만 원이나 있었습니다. 그걸로 민들레국수집을 시작했습니다.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의 “환대의 집”을 흉내 냈습니다. 피터 모린의 말씀처럼 “개인의 희생으로 이웃을 돕는 것”을 흉내 내려니 그냥 일반 식당으로 시작했습니다. 사업자 등록을 하고 보건증을 받고 문을 열었습니다만 손님들에게 돈을 받지 않으니 사업자 등록도 필요 없었습니다. 

민들레국수집을 열면서 네 가지만은 꼭 지키기로 했습니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다. 기부금을 얻기 위한 프로그램을 하지 않는다. 생색내면서 주는 돈은 받지 않는다. 조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하면서 착한 사람들이 나눠주는 도움으로 운영한다는 것입니다.

시작하자마자 진땀이 났습니다. 운영비를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세상물정 몰랐습니다. 쌀은 떨어지고 반찬거리로 콩나물 한 줌 사는 것도 빠듯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작은 도움이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대사들인 가난한 사람들과 사는 것은 참 쉽습니다. 돈도 많이 들지 않습니다. 거창한 것은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따뜻한 마음만 담아서 대접하면 됩니다. 우리 손님은 밥과 국 그리고 반찬 한두 가지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달걀프라이 하나 얹어드리면 세상을 다 얻은 것 마냥 좋아합니다. 꼴찌를 첫째로 대접해주면 거기서부터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립니다.

 

사진=서영남
사진=서영남

민들레국수집은 조금 여유가 생겨 커질만 하면 나누었습니다.   

2014년 4월에 인천 민들레국수집 운영은 안사람인 베로니카께 맡기고 필리핀으로 들어갔습니다. 마닐라 칼로오칸의 ‘라 로마 가톨릭 공동묘지’에서 필리핀 민들레국수집을 운영했습니다. 나이 60세에 새롭게 시작한 일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필리핀의 가난한 아이들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16년 3월에 아주 난감한 일이 생겼습니다. 인천교구에서 주보에 ‘민들레국수집에 대한 인천교구의 입장’이란 글이 실렸습니다. 2014년에 민들레국수집과 인천교구와의 관계가 깨끗하게 정리된 줄 알았는데 아닌 밤중의 날벼락이었습니다. 이러다가 민들레국수집이 문을 닫는 것은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사정이 어려워졌습니다.

필리핀 민들레국수집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장학금 지원만 남겨두고 2017년 1월에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몇 년을 겨우겨우 민들레국수집을 운영하면서 필리핀 민들레국수집도 조그맣게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2019년 말에야 카비테와 나보타스 두 곳에 민들레국수집을 마련했고 필리핀 봉사자들이 스스로 운영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라는 팬데믹이 닥쳤습니다. 팬데믹으로 많은 노숙하는 분들이 소리 소문 없이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만나는 이십 년의 세월이 놀라운 은총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의 삶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대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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