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안에서도 봄은 온다
상태바
냉장고 안에서도 봄은 온다
  • 장진희
  • 승인 2023.01.15 12: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난이 살려낸 것들 - 진도에서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고3이 된 아들의 전화를 받는 순간 아, 서울로 가야 하는가 보다 하는 직감이 왔습니다. 별 다른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의논할 것이 있다고 엄마가 서울에 와달라는 말을 듣고는 득달같이 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로 가는 내내 내가 서울에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차저차 해서 아들 덕분에 일년 동안 서울살이를 하러 갑니다. 십년 전 서울 떠날 때 황폐하기 짝이 없던 가슴이 그새 시골 살면서 많이 포근포근해져서 어지간하면 서울살이를 버틸 것도 같습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에미에게 긴급신호를 보낸 때이니......

큰 짐이라고는 냉장고가 처음 나왔을 때 집에서들 많이 쓰던 작은 냉장고와 아들이 쓸 책상 정도인 살림살이를 고물트럭에 싣고 서울로 갑니다. 따뜻한 남쪽나라라서, 뽑아서 땅속에 묻어둘 것도 없이 밭에서 그대로 겨울을 난, 포기가 차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싱싱한 오줌 똥으로 자란’ 배추와 무를 뽑아 짐칸 한 귀퉁이에 싣습니다. 쑥도 조금 뜯고 냉이도 조금 캤습니다. 치킨과 피자 맛에 길든 아들 입에 그것들이 들어가게 될지 어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싣습니다.

저차여차 해서 방학 때와 연휴 정도에만 모자상봉 했던 칠 년 세월 동안 에미는 제 손으로 산에서 바다에서 들에서 밭에서 해온 그 싱싱하고 맛난 것들을 아들에게 못 먹인 것이 가장 큰 한이 되었습니다.

비록 서울까지 오느라 몸살 하고 삐들삐들 말라가는 것들이라도 마트에서 사다 에미 손으로 밥을 지어 먹일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치킨이나 피자보다 된장국이랑 배추겉절이를 잘 먹고, 과자보다 밥솥에서 눌린 누룽지를 잘 먹으면 오지기 짝이 없습니다.

고3 아들에게 필요한 건 딱 그것, 에미 훈김이었습니다. 학교 갈 때 에미가 해주는 밥 먹여 보내고, 학교 갔다 오면 에미가 해주는 밥 먹이는 것, 그것 말고는 에미가 할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서울에 살러 가야 한다니까 동네 아짐들이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이잉! 아들 밥해주러 갈라고?”

에미가 자식한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일이 밥해주는 일임을 알았던 우리 어머니들은 그렇게 한마디로 말했습니다.

아침밥 먹여서 아들 학교 보내고 나면 집 주위의 풀과 나무를 찾아 나섭니다. 되도록 공원보다는 아무렇게나 우거진 풀섶이나 사람 손을 덜 타고 자라는 나무를 찾아다닙니다.

서울 살 때, 저 아들이 뱃속에 들어 있을 때도 셋집을 구하러 다니면 풀섶이라도 볼 수 있는 곳, 산자락 끝으로 나무 몇 그루라도 볼 수 있는 곳을 찾아 박통 같은 배를 부둥켜안고 정류장에서 이십 분 이상 걸어 올라오는 곳에 집을 얻곤 했습니다.

아파트 울타리와 고속도로 방음벽 사이에 그런 땅이 보입니다. 이눔의 세상에 주인 없는 땅이 있겠습니까만 주인 없는 땅처럼, 버려진 땅처럼 아무것도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아마 짜투리 시유지(市有地)쯤 되는 모양입니다. 길도 아닌 길을 따라 가까이 갑니다.

세상에나! 밭이 있습니다. 끝도 갓도 없는 이눔의 서울에 무・배추 심었던 밭, 상추・머위・쪽파 올라오는 밭이 있는 것입니다.

경사가 심한 곳은 나무가 제멋대로 자라고 있고, 고속도로 방음벽 밑 배수로를 따라 좁고 긴 밭이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좁은 밭두렁길을 만들며 일구어져 있습니다. 땅은 임자가 있건 없건 밭은 확실히 임자가 있는 모양으로 어지간한 곳에는 촘촘히 빼곡히 밭 울타리가 둘러져 있습니다. 쓰다 버린 대나무 발이며 망가진 책상 판자대기며 찌그러진 샷시 방충망 등등으로 알뜰살뜰 쪼개고 쪼개 나눈 밭입니다. 그 작은 밭뙈기에 사람 손 간 흔적이 어지간히 있는 걸 보니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지 알겠습니다. 금싸라기 서울 땅에서 푸성귀를 심어 먹다니...... 푸성귀 이파리가 금빛이 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밭 울타리를 넘어 뿌리를 뻗은 머위, 그 쌉싸름 고소한 잎을 뜯습니다. 흙길로 넘쳐 자라고 있는 돌나물을 뜯어 주머니에 채웁니다. 아들이 먹거나 말거나 내 이 푸르디푸른 잎을 된장에 싸고 고추장에 비벼먹으면 살 것 같습니다.

냉장고에는 혼자 먹다 다 못 먹은 남도의 쑥과 냉이가 노랗게 떠 있습니다. 아직 푸른빛이 살아 있는 잎을 애쓰고 골라냅니다. 마지막 쑥국을 끓여 싱싱한 머위잎 몇 장과 돌나물 반찬으로 저녁상을 차려야겠습니다. 오늘은 에미식으로.

(사실은 이때 부엌 바닥에 앉아 찔끔찔끔 짰습니다. 하얀 꽃 피우려고 꽃대 올라오고 있을 냉이, 뒷이파리 포슬포슬 제법 두툼해져 국에 넣으면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질 새파란 쑥잎, 집 앞 석축 밑으로 까만 흙을 뚫고 올라와 있을 연둣빛 생생한 머위잎, 마당가 돌 주위에 지천으로 퍼져나고 있을 돌나물...이 그리워서.

봄 바람, 봄 햇살, 밑거름 푹푹 섞어 땅을 고르고 이때쯤이면 감자를 놓을 텐데, 생강도 놓을 텐데... 훌쩍 훌쩍!)

아직 먹을 만할랑가...... 신문지에 싸서 야채칸에 넣어두었던 무, 배추 남은 것도 열어봅니다. 그 순간!

아아! 세상에 이런 일이!

무는 무청 자른 자리에서 새 이파리가 돋고 있고, 배추는 꽃대궁이 올라와 있는 것입니다. 봄이 되어 밭에 있는 배추가 동 나면 더 이상 먹을 수 없어, 씨앗을 위해 남겨 놓지 않으려면 이제 뽑아 버립니다. 뿌리 뽑혀 밭에서 굴러다니는 배추에서 대궁이 올라와 꽃을 피워내는 것은 봤어도, 밭에서 뿌리가 뽑히고 끌텅이 잘린 지 보름이 지났는데, 냉장고 안의 온도는 겨울도 한참 겨울인데 배추가 꽃을 피우기 위해 키워 밀어올리고 있는 꽃대궁을 보는 것은 처음 일입니다.

썩어 문드러지기 전까지 배추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봄이 온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온도가 아무리 낮아도, 햇살 한 줌 받을 수 없어도, 바람 한 점 스치지 않아도 봄이 온 것을 아는 것입니다.

배추는 이 한 몸 살아 꽃을 피울 수 있을지, 씨앗을 맺을 수 있을지 아무런 계산이 없습니다. 아직 살아 있으니 꽃 피울 준비를 하고, 봄이 되었으니 꽃대궁을 밀어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냉장고 안에서!

오오!
하느님!
부처님!
천지신명이여!
배추 한 포기에 숨어 있는 그 이름이여!
배추가 말합니다.
“냉장고 안에서도 봄은 온다!”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무주에서 진도, 지금은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