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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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 최태선
  • 승인 2023.01.15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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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와 형제들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가지는 형제애에 의해 사실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의 만남은 자매와 형제로서의 만남이다. 나는 점점 더 형제애가 모든 관계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자매와 형제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자매와 형제의 관계로 살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형제애가 없는 곳이 되었다. 형제애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수도원과 같은 곳뿐이다. 그러나 수녀들은 다른 수녀와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수사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상태에서 나누는 형제애가 얼마나 허무한가. 친밀함 없이 나누는 형제애란 과연 어떤 것인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유달리 까다로운 수녀들이 등장하는 것은 이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친밀함을 부정하는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성을 위해 만날 수 있었던 수녀들과의 교제를 바란 적이 있지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만남이 만일 있다면 그들은 그런 관계를 고백하고 그런 관계를 가급적 빨리 청산해야 한다. 그것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향해야 하는 그들의 삶이다. 친밀함을 걸림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긍휼함을 가질 수 있을까. 그래서 영화에 등장하는 고아원이나 학교의 수녀들이 그처럼 냉혈한이고 잔인한으로 그려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영화나 소설 속의 수녀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묘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영화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묘사되는 장면들을 생각해보라. 영화나 소설은 매우 실증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관객이나 독자에게 어필할 수 없다. 영화나 소설 속의 이야기가 과장되거나 어느 한 면만을 부각할 수도 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 될 것이다.

형제애를 이야기할 수 있는 수도원의 사정이 이러니 그 외의 사람들의 경우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서 형제애란 사족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형제애가 모든 관계의 토대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는 결코 그리스도교가 될 수 없고 우리는 오늘 그렇게 그리스도교가 아닌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을 보고 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오늘날과 달랐다. 나는 함석헌 선생의 <그대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를 읽을 때마다 그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내가 제도권 교회의 일원이었을 때는 그 시가 말하는 그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마주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그런 사람을 볼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역사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상을 알게 된 이후에는 함석헌 선생이 말하는 “그 사람”이 바로 동료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그 사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형제애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하느님의 가족이 되고 서로가 자매와 형제들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관계를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의 시를 읽으며 그들은 예수님만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초기 교회의 삶을 생각해보자. 교회가 사람들이 모일 집이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장례식이나 과부들을 위한 생필품을 요구했을 때, 교회의 회원들은 그들 자신의 삶과 자원의 일부를 내어줌으로써 그런 필요들에 응했다. 신자들의 관대함은 아마도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은 그들의 관대함의 이유가 아니었다.

이 사실에서 보듯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형제애를 기반으로 하는 삶이었다. 그들은 공동의 소유를 실천했고, 그들 가운데는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애는 그들 가운데 임한 하느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었고, 또 그들의 형제애가 곧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임할 수 있게 하는 촉매제였다. 그런 그들의 삶의 방식은 관대함으로 드러났고 그것은 교회 성장의 이유였지만 그러나 교회 성장을 이유로 그들이 관대함을 실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형제애의 실천이었고 형제애가 가지는 필연적인 결과였을 뿐이다.

초기 교회의 형제애를 무력화시키고 사라지게 만든 사람이 바로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는 “구세주의 가르침으로 향하게 하는 유인”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구제에 제국의 재정을 쏟아 붓는 법령을 반포했다. 그 법령의 실천의 일환으로 그는 국가가 운영하는 빈민구제소를 설치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이것이 좋은 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은 맘몬이 교회를 장악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동안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장의 이유가 되었던 그리스도인들의 관대함은 국가가 제공하는 돈의 힘에 의해 무의미해졌다. 그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애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고 형제애가 사라진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 아닌 그리스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교 아닌 그리스도교가 된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로 알게 된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의 공동의 소유와 관대함은 치열한 경쟁의 삶을 문제가 있는 삶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고, 그것은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부자들까지 매료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형제애를 실천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던 ‘샬롬’으로 인해 가능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었고 주님이 주시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화가 있었다. 그것이 복음의 복음 됨의 비결이자 이유였고, 그것은 능히 세상을 이겼다.

이제 다시 위에 인용한 함석헌 선생의 시를 천천히 읽어보라.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서로에게 되어야 할 관계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됨이고 형제애의 형상이다. 마침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다.

결론을 빈칸으로 둔다. 각자의 생각으로 결론을 맺으시기를 바란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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