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 거지탑과 촛불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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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거지탑과 촛불 할머니들
  • 장진희
  • 승인 2023.01.02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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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살려낸 것들 - 진도에서:

세상은 이 할머니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더 큰, 오늘은 어제보다 더 심각한, 내일은 오늘보다 더 치명적인 일들이 방방곡곡, 동서남북, 세상 이쪽 저쪽, 이 하늘 저 하늘에서 줄줄이 사람들 억장 무너질 일들만 골라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할머니들은 담양 군청 앞에 모여 있습니다. 벌써 열 달이 넘었습니다. 아스팔트 지열이 늙고 기운 없는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하는 지난 여름부터 밤에도 들락거리는 덤프트럭을 막기 위해 공장 앞에서 촛불을 들고 지켜섰던 늦더위 기승 부리던 가을을 지나 또 흰눈 펄펄 날리는 엄동설한 텐트 둘러놓고 이불 뒤집어쓰고 맨바닥에 앉아 있던 겨울을 지나 농번기가 되어서 주름지고 매디 굵은 늙은이 손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논밭도 버려두고 다시 여름이 돌아올 때까지 칠십 팔십을 넘긴 할머니들, 아흔을 넘긴 할머니까지 오늘도 아침 먹고 군청 앞으로 나왔습니다. 점심은 또 라면입니다.

그중 젊은 사람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호소라는 호소는 다 해보고 법 없이도 살 사람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법조문 뒤져가며 고소 고발 다 해봤지만 오늘도 밤 아홉 시 열 시까지 대여섯 개 마을이 바라보고 있는 공장에서 쇄석기가 바위를 자갈로 깨는 소리가 까맣게 고요한 시골 온 들판을 쿠웅쿵 쿠다당탕 터엉텅 울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소한 일까지 어떻게... 어차피 질 싸움... 하면서 할머니들이 백번 옳고 공장이 천번 잘못한 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도 어쩌지 않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이 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중에도 군청은 허가도 받지 않고 불법가동하면서 세금도 내지 않고 막대한 돈벌이를 계속하고 있던 공장을 승인해주었습니다. 군청이고 경찰이고 도청이고 심지어 감사원까지 모두 공장하고 사돈이라도 단단히 맺었나 봅니다.

할머니들은 젊어서 같으면 애 떨어질 소리 땜에 심장병이 생길 지경이고 날아오는 먼지 때문에 빨래를 널어 말릴 수도 없고 논밭에서 기른 작물들은 먹을 수도 내다팔 수도 없게 되어서 어차피 집에 앉아 있을래야 있을 수도 농사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정말로 철저히 처절하게 당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늘도 군청 앞에 나와 앉아 있거나

"(주) 담양석재 물러가라"
"쇄석기 가동 중단하라"
"군청은 승인취소하라"

등등의 구호가 적힌 앞치마를 뒤로 두르고 굽은 허리로 군청마당을 어슬렁거리며 일인시위를 하는 일뿐입니다. 이제는 자식들조차 말립니다. 하지만 평생 처음으로 남편에게, 자식들에게 큰소리를 칩니다.

"나 하는 대로 내비 둬어!"

오늘도, 오늘도, 오늘도 할머니들은 시위를 합니다. 행여 도시 나간 자식이 돌아올세라, 그 자식 손주들 왔을 때 망가진 고향이라고 뒤돌아서 가버릴세라 할머니들이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군청 앞에 나와 시위를 합니다. 일년이 다 되도록.

더 많은 돈과 힘을 갖기 위해 돈과 힘으로 세상을 말아먹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리는 일만 평생 해온 할머니들을 능욕하고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이긴 적이 몇 번이나 될까? 세상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을까?

<금강>에서 신동엽 시인은 동학, 3.1운동, 4.19로 이어진 흙가슴의 힘이 가슴벅차 울먹였습니다. 혁명의 좌절이 젊은 시인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았다면 5.18로, 6.10으로 이었을 터인데, 그리고 지금 2009년을 가장 악랄한 싸움 중의 하나로 이어놓을 터인데...

촛불할머니들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이제 바닷가 집에까지 거의 다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군데를 더 들러야겠습니다. 할머니들 때문에 아린 마음을 달랠 데는 거기밖에 없습니다. 운주사!

 

운주 외불(사진출처=법보신문)
운주 외불(사진출처=법보신문)

지금은 일주문에 '雲住寺'라고 씌어 있지만 오래 전에는 '運舟寺'였다 합니다. 높지 않은 산 위 공사바위(이곳에서 '그 님'이 천불천탑을 통해 천지공사를 한 모양입니다)에서 보면 정말로 천불천탑이 늘어선, 양쪽 산 사이의 좁은 골짜기가 배를 띄운 모양입니다. 지금은 조금밖에 안 남아 있지만 눈을 감고 천불천탑이 들어차 있던 때로 돌아가 봅니다. 가물가물 안타깝게 그 모습이 보일 듯 말 듯 합니다.

골짜기 한가운데 높고 반듯한 탑들을 돛대라 치면 돛대 뒤에 석실 하나에 등을 맞대고 앞뒤로 한 쌍의 불상이 앉아 있습니다. 그 뒤에 둥글고 두툼한 돌판이 층층이 얹혀져 있는 탑이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아주 낯익고 깊은 감동이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그 뒤 대웅전 지나 산으로 오르는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돌탑들은 정말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실 감는 실패 모양, 항아리를 쌓아 놓은 모양, 돌탑의 잔해를 긁어모아 올려놓은 것 같은 맷돌 쌓아 놓은 모양... 한가운데 높고 반듯한, 다른 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몇 기의 탑 말고는 운주사의 돌탑들은 눈물이 날 만큼 정겹고 소박한 모양새가 탑치고는 독특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난하지만 넘칠 것도 부족할 것도 없이 어질고 지혜롭게 살아온 사람들 마음, 그냥 우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 소박함이 주는 아름다움과 기운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압도하고도 남습니다.

[돌 원판을 이층으로 쌓은 탑은 실패 모양이고, 3층으로 쌓은 탑은 명당탑이라고 합니다. 칠성판의 바위 원판이 북두칠성의 별을 새긴 것이니까 이 원판 탑들은 별을 쌓아 놓은 모양이네요. 앗! 그러고 보니 가운데 '돌방 쌍부처(석조불감)' 뒤의 '돌원판 층층이탑(원형다층석탑)'은 북두칠성을 땅에 세워놓은 모양이네요. 지금은 육층으로 남아 있지만 그 온전한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것을 알 수 있는 모양으로 보자면 7층 정도였을 것 같네요.]

천불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홀쭉한 얼굴, 편편한 얼굴, 얼굴 모양만 한 마음의 얼굴,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 선남선녀의 얼굴, 착한 아가의 얼굴, 옆동네 아저씨의 얼굴... 그냥 우리의 얼굴입니다.

야트막한 양쪽 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불상군과 탑들, 그 와불이 일어서는 날 개벽세상이 온다는 한쌍의 누워 있는 불상이며(그런데 아무래도 그 와불은 이미 개벽세상, 하늘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와불은 북쪽하늘 북두칠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칠성판이며 불가사의하기 짝이 없는 이 천불천탑의 비밀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갈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그 비밀을 가슴으로 알아가고 있는 듯도 합니다. 그러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처음 운주사를 갔을 때가 언제인지 기억할 수 없습니다. 처음 보는 놀라움보다도 마음에 낯설지 않은 탑과 불상들이 아주 오랫동안 봐왔던 것처럼 느껴졌을 뿐입니다. 그때 항아리탑은 다랑이논 가운데 있었습니다. 직선이 아니라 펼쳐진 반원을 그리듯 둥그스름한 논두렁선과 항아리탑의 선이 너무나도 어울려서 그 항아리탑이 마치 다랑이논들을 위해 세워져 있는 것처럼 여겨질 지경이었습니다. 그 다랑이논조차도 애초에는 탑과 불상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었겠지만 탑과 불상을 닮은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먹던 다랑이논은 그때 항아리탑과 서로 없어서는 안될 존재들처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 그처럼 아름답게 어울리던 다랑이논이 싸그리 뭉개지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넓은 잔디밭 위에 생뚱맞기 그지없이 항아리탑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얘기는 본인이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독일 사람 요헨 힐트만이 쓴 <미륵>이라는 책에 사진과 함께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입구에서 들어오면서 매표소를 지나, 나중에야 세워진 일주문 왼쪽으로 탑과 불상이 가장 많이 널려 있었을 것 같은, 이 골짜기에서 가장 넓고 황량한 잔디밭도 처음에 보았을 때는 다랑이논이었습니다. 모포기가 꼽힌 초여름이거나 푸르름이 물결치던 한여름이거나 투명한 햇살 아래 황금빛으로 일렁이던 가을이거나 가실이 끝난 빈 논이거나... 소박하고 어진 사람들의 하늘에 가닿을 꿈을 올린 천불천탑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배경이었습니다.

 

화순 운주사 오층석탑, 일명 거지탑(사진출처=k-heritage.tv)
화순 운주사 오층석탑, 일명 거지탑(사진출처=k-heritage.tv)

일주문에서 가까운 왼쪽 산 위에 칠성판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과 가장 인연이 깊다는 별자리 북두칠성의 크기와 밝기와 거리와 정확히 맞아떨어지게, 크고 두텁고 둥근 바위를 산에 새겨놓은 칠성판 말입니다.

오른쪽 첫 불상군 위에 칠성판과 마주보고 그 탑이 있습니다. 운주사 첫 탑입니다. 그 탑 다음으로 돛대라 칠 높고 반듯한 탑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절에서 만들어놓은 안내판에 '실패탑' '항아리탑'... 이렇게 그 모양따라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그 탑을 '거지탑'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을 보고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마음이 되었는데 그런 대로 거지탑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거지탑을 처음 본 날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냥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생각이고 느낌이고 없었습니다. 그냥 평생에 쌓인 설움,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듯했습니다. 가슴이 다 녹아내리도록 울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탑은 처음 보았습니다. 층마다 크기도 모양도 다 제각각으로 모나고 깨지고 울퉁불퉁하고 찌그러지고 제멋대로 생긴 돌덩이를 깎지도 않고 다듬지도 않고 생긴 대로 그대로 얹어 놓은 탑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이렇게 탑을 쌓을 생각을 했는지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일정하게 잘 깎인 돌보다 쌓기에 훨씬 어려웠을 것입니다. 중심을 잡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절묘하게 세워 놓았습니다. 오묘하고 절묘하고 아프고 시리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이 뻥 뚫리는 그런 아름다움이 천하 명물 탑은 저리 가라입니다.

그 뒤로도 운주사에 갈 때마다, 거지탑 앞에 설 때마다 꼭 그만큼씩 울었습니다. 그 탑을 바라보는 사람 눈에서 그렇게도 눈물이 나오는 것이라면 그 탑을 쌓은 사람들 눈에서는 얼마만큼 피눈물이 흘렀을 것인지... 그렇게 못나고 가난하고 천대받고 버려진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위해 그 한을 풀어낼 원을 담아 그렇게도 처절하게 쌓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 눈물의 정체가 한(恨)과 원(願)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지탑은 세상의 모든 권위와 반듯함과 욕망을 날려버리는 기발함과 발랄함이 있었습니다. 가장 많이 운 사람만이, 가장 처절하게 당한 사람만이 깃발 세울 수 있는 지독한 자유가 보였습니다. 아아! 개벽세상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세워놓은 것입니다.

운주사 거지탑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입니다.

거지탑 앞에서 촛불 할머니들을 생각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지금 거지탑은 촛불 할머니들이 세운 것입니다.

돈과 힘을 위해 돈과 힘으로 만든 물건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쌓은 공든 탑입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탑입니다.

가만히 손을 얹어 어루만져 봅니다. 경사지고 울퉁불퉁한 바닥을 딛으며 탑돌이를 합니다. 맨바닥에 엎드려 백팔배를 합니다.

운주사를 나와 집에 올 때까지 한참을 달리도록 마을 길가에 간간 '거지탑' 모양의 탑들이 보입니다. 거지탑의 아름다움과 기운이 사람들 마음 속에 퍼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무주에서 진도, 지금은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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