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가 쌓여 믿음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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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가 쌓여 믿음이 되다
  • 최태선
  • 승인 2023.01.02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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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vargamor.wordpress.com
사진출처=vargamor.wordpress.com

어제 케이비에스의 <이쓔 픽쌤과 함께>를 잠깐 보았다. 픽쌤이 두려움의 반대가 무엇인지 물었다. '안 두려움'을 비롯해 유머러스한 패널들의 여러 대답이 나왔다. 이 질문은 내겐 애초에 질문거리가 아니다. 두려움의 반대말은 믿음이다. 쌤의 대답은 ‘신뢰’였다. 내가 생각하는 믿음이 바로 신뢰다. 내가 말하는 믿음이란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의탁과 신뢰의 관계를 의미한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그 일에서 진보를 이뤘다. 그 신뢰를 이루는데 전적으로 기여한 것은 나의 가난이다. 나의 가난은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게 만든다. 나는 허공처럼 보이는 하느님을 바라보았고, 놀랍게도 허공처럼 보이는 그 하느님의 손길을 현실 속에서 보고 체험했다. 물론 하느님의 구원 혹은 도우심은 내가 바라는 때에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임하지 않는다. 그분은 언제나 그분의 방식대로 나를 이끄시고 내게 공급하신다. 그런데 한참 지난 후에 보면 그분의 그런 방식과 공급이 내가 원하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완전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인정하게 된다. 그것이 나를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이끈다.

그 신뢰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작은 믿음이 생겨난다. 그 믿음은 내게서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 죽어도 조금도 아쉽지 않다. 두렵지도 않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 역시 두려움의 일종이다. 나는 시시하게 그런 일에 천국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내 작은 믿음 앞에서는 천국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천국이 없다면 천국보다 더 완벽한 그 무엇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간다고 믿고 있는 천국에는 갈 생각이 없다. 그들이 바라고 믿고 있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라 '영원히 집값이 떨어지지 않는 압구정동’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게 하느님에 대한 나의 신뢰이다. 그래서 티브이를 보면서 아내에게 복음이야말로 모든 문제에 대한 정답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예수의 지문(指紋)이 스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묘수(妙手)이다.”라는 말을 좋아하고 그것을 즐겨 사용한다. 그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전적으로 신뢰했던 예수님에 대한 내 믿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런 내 믿음에서 나오는 생각들을 가급적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글을 쓰면서도 점차로 페친의 수를 줄여가고 있다. 페친의 창에 올라오는 글을 읽어보고 내 글을 공유하거나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인가를 판단한다. 그러나 이것은 판단이라기보다는 배려이고 미래의 파국을 줄이거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어쩌면 대단히 교만하게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그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되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말씀은 대단히 모순되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심판(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생각을 해보자. 남을 심판(비판)하지 않고 이 말씀대로 할 수 있는가.

이 말씀은 남을 개와 돼지로 판단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사람을 개와 돼지로 여기는 것이 비판이 아니고 심판이 아닐 수 있는가. 그러므로 심판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할 수 없다. 사람을 개와 돼지로 여기는 것은 성공한 권력자들만의 몫이 아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욱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개와 돼지로 여긴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없다. 특히 당사자인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그 답을 예수님과 가장 닮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묵자에게서 찾았다.

"미인은 문밖에 나오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만나길 원한다.
스스로 이름을 드러내려 애쓰기보단 내실을 다지는 것이 좋다."

묵자의 표현이 정말 좋다. 그는 다른 사람을 개나 돼지로 표현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보통 사람으로 그대로 놓아둔 채로 진리를 소유한 사람을 미인으로 표현했다. 과연 ‘겸애’를 말하는 사람답다. ‘겸애’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묵자가 말하는 미인을 나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리를 가진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으로 살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묵자는 그런 사람을 미인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미인은 문밖으로 나오지 않아야 한다. 진리는 스스로를 입증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룩한 것과 진주이다.

거룩한 것과 진주는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 그래도 알아볼 사람은 그 가치를 볼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날리는 겨와 같이 된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을 마구 흔들어대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리라면 오늘날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따위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 일이야말로 사람을 개와 돼지로 심판하는 것이며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것이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일이다.

지난 이십 여 년 간 가난하게 살면서 나는 복음에 대해 눈을 뜨고 그곳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지혜인가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소중해서 나도 모르게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내 의도와 달리 그것은 그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짓밟고 돌아서서 나를 물어뜯었다.

남을 심판(비판, 판단)하지 않고 진리를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묵자가 말한 대로 문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아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덮어 둔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것은 누구에게 입증하거나 인증을 받을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내게 네가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내가 한 일은 내가 내 길을 가는 것이다. 아니 문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숨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이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진 신뢰를 통해 그것이 참으로 소중한 일임을 안다.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감사함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내가 가진 작은 믿음이 얼마나 가지기 어려운 믿음이며, 가지면 가질수록 적어지는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문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처럼 아버지의 일하심을 바라본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일하심을 보고 나도 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 믿음이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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