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왜 악을 선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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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왜 악을 선택하는가
  • 김선주
  • 승인 2022.12.26 17:37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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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12월 7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모처에서 열린 윤석열대통령님을 위한 119기도회 (사진출처=평화나무)
12월 7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모처에서 열린 윤석열대통령님을 위한 119기도회 (사진출처=평화나무)

모든 종교에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선악 관념이 있다. 악에 저항하고 선을 선택하여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지향점이다. 그래서 어떤 종교를 믿든지 종교인은 선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인식의 단면을 보면 개인적인 차원의 선함에 머물러 있다. 즉, 착하고 겸손한 사람, 남을 잘 도와주는 사람, 배려심이 많은 사람 등과 같은 개인적 자질에서 선함을 찾는다.

하지만 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악을 키우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구제와 선교에 열심인 어느 그리스도교인이 있다 하자. 그가 타인에게 베푸는 구제는 선한 것이지만 그가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 선하지 않다면 그의 구제와 선교도 악이다. 부의 축적 과정이 기만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구조라면, 그를 통해 축적한 부와 그의 구제행위도 결국 악이 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처럼 위선적인 것도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이 구조악을 보지 못한다. 자신의 이익이 어떠한 구조에서 발생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 밖의 사회가 가진 선악 관념은 개인의 선한 자질보다 공동체적 가치와 관련되어 있다. 법과 제도, 그리고 윤리와 도덕을 위반하지 않을 때 기본적으로 시민으로서의 자격과 권리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는 개인의 종교적 자질에만 초점을 맞춘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고 성실하게 예배에 참석하고, 구제와 선교를 하는 것이 최상의 선이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교육받은 사람들이 선거철이 되면 누가 선한 사람이고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가를 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적 이해관계에서는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는 신앙인들이 공적 차원에서는 무지한 것이다. 이 무지가 집단화된 게 지금의 한국 개신교다. 그래서 착한 개신교인들은 조작된 정보나 가짜 뉴스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슬쩍 귀뜸만 해주면 순교적 사명을 가지고 카톡으로 퍼 나른다. 결국 착한 신자들이 퍼나른 조작된 정보나 가짜뉴스로 나쁜 정치인이 권력을 잡게 되면 그 피해는 모두에게 돌아간다.

성서의 맨 마지막 책 <요한묵시록>은 우주적 심판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로마 황제의 폭압정치에 저항하여 “죽도록 (하느님께) 충성하라(Be faithful, even to the point death.)”는 정치적 메시지다. 세속적 폭압정치에 굴복하여 양심을 저버리고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남기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끝까지 견디며 경건한 삶을 유지하라는 명령이다. ‘충성하라’는 우리말 번역은 사실 ‘경건하라’는 말이다. 진정한 왕은 로마 황제가 아니니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신구약 66권 중에 가장 정치적인 책이 요한묵시록이다. 요한묵시록의 수신자인 소아시아 일곱 교회 교인들은 요한이 사용한 비유와 상징의 그림언어들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것의 정치적 메타포에 대해 의심의 여지없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복음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정치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되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함이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이러한 부조리는 본질을 보는 눈이 왜곡됐기 때문이다. 세계와 인간의 본질, 영혼의 본질, 구원의 본질 같은 이해가 인간사회의 구조를 함께 보지 못할 때 초월적 감성만 남게 된다. 이 초월적 감성을 넘어 사회적 정의와 구조로로 선악 관념을 이해하지 않으면 무지와 폭력이 지배하는 종교가 된다. 자기도 모르게 거짓과 폭력에 동조하는 위선적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윤석열은 한국 개신교회가 선택한 악이다. 그것도 최악이다. 그런데 개신교는 아직도 악을 악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하고 그에 동조하면 그 또한 악이다. 정치적 악은 선거를 통해 바꿀 수 있지만, 종교적 악은 개선될 개연성이 없다. 망하는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다.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하느님이 교회인들 무너뜨리지 못할까?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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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태 2022-12-29 16:15:42
작금의 정치인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선택은 사회 정치적인 동물로 살아가는 개인의 정치적 판단의 선택이지 교회나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은 ‘성전제사제도’의 종말을 예언한 것으로, 주 후 70년에 디도(Titus)의 로마군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마 24:2).
이는 예수께서 당시 죄 사함의 구원은 더 이상 ‘성전제사’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것이지요!

이정태 2022-12-29 16:14:38
그러나 성경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 당시의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를 말씀한 것으로 본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그리고 산상보훈이 인간윤리•도덕의 최고의 이상적인 내용을 말씀한 것으로써 사람이 지킬 수 없는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삶과 신앙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부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쳐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기 때문입니다. (막 7:7)
친구가 올린 글도 같은 맥락으로, 말씀의 본질과는 무관하게 주관적으로 윤리•도덕에 입각한 인간 교훈적인 관점의 정치평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정태 2022-12-29 16:13:24
씀이 됩니다. 즉, 그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정태 2022-12-29 16:08:09
곧,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위한 말씀이기에 인간의 선과 악을 구분하여 취하고, 행하는 윤리•도덕이나 양심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분명하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6:51; 11:25; 14:6).

기독교가 인간의 권선징악의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라면 그 가치는 퇴색되고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이전에 이미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도덕과 철학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BC 6C에 아이소포스, 석가, 공자가 있었고, BC 5C에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있었으며, BC 4C에 아리스토텔레스, 맹자, 장자, 노자가 있었습니다.

그럼 ‘기독교인의 대헌장’, ‘기독교 도덕률의 근본’, ‘기독교 황금률’ 등으로 평가받는 예수께서 산에서 행한 첫 설교인 산상보훈은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인간의 윤리•도덕적 기준으로 본다면, 대부분은 보통의 사람들이 지킬 수 없는 말

이정태 2022-12-29 16:06:38
를 멸하는 것입니다(요일 3:8, 히2:14).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master plan에 속한 것으로 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인 주님으로 받들 수 있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지요.

기독교의 선악의 개념은 ‘하나님과 함께함’, ‘하나님의 뜻(말씀)을 받듦’, ‘성령의 인도함을 받음’의 의미입니다.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떠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선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나, 그 기준과 가치는 사람이 규정하여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규정하는 윤리•도덕과 양심의 가치는 문화와 종교 및 시대에 따라 변화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진리의 말씀이라고 함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가치와 기준이 변함이 없다는 것이고, 반드시 생명, 영원한 생명과 관계하고 함께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