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시와의 동행, 너를 길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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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시와의 동행, 너를 길들이고 싶다.
  • 문지온
  • 승인 2022.12.19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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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온의 심온재 이야기-네시와의 동행(1)
사진=문지온
사진=문지온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오른쪽 등 뒤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 무언가에 이끌린 듯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 녀석이 있었다. 타고 남은 재를 연상시키는 연회색 털에 연한 호박색 눈빛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 녀석과 나 사이에 ‘안전거리’가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눈이 마주쳤는데도 녀석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햇살에 데워진 기도방 섬돌 옆에 가만히 앉아 여전한 자세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그 고요한 자태와 눈길이 북인도 리쉬케시에 머물 때 자주 만났던 힌두교 스와미지를 연상시키길래 내심 감탄하며 속으로 말했다. “저 녀석, 참 신기하네. 어쩜 저리 눈빛이 고요하지? 꼭 요기(Yogi) 같아. 이름을 요기라고 지어줄까?”

그날, 그 만남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먼저 등을 돌려 풀을 계속 뽑았거나 녀석이 먼저 몸을 돌려 꼬리를 세우고 유유한 걸음으로 사라지면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몇 분의 경험’, 그러니까 하던 일을 멈추고 아무런 목적 없이 난데없이 나타난 존재에 함박 눈길을 주고 서로를 바라보았던 경험은 그날 밤 내게 깊은 질문을 던지게 했다. “내 생애를 통해 이렇듯 아무런 목적이나 의도 없이, 그저 그 존재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즐거움으로 누군가(혹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감탄했던 적이 있었던가? 있었다면 언제 누구(혹은 무엇)와 함께였지?” 하는 질문. 슬프게도 확연하고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예닐곱 살 무렵 얼굴이 보름달 같이 생겼다고 해서 “달이야 언니!”라고 불렀던 동네 언니를 따라 나물을 캐러 산에 갔다가 누런 봉분 위로 쏟아지는 오후의 황금빛 햇살에 감탄했던 일과 초등학교 때 동무들이랑 어울려 산에 갔다가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바위에 누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던 일이 희미하게 떠오를 뿐.

예상과는 다른 결과에 고개에 갸웃해졌다. 사실, 나는 인생에서 적잖은 시간을 가난하고 소외된 현장을 찾아다니며 살았고 매매춘 여성들에게도 “언니!”라고 부르며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내는 그녀들의 생명력에 감탄할 만큼 세상의 잣대와 상관없이 사람을 보고 받아들이는 좋은 면이 있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여러 가지 은총 중에 나는 이 은총에 가장 많이 감사한다). 그래서 순수했던 마음으로 그분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떠오를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이유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때 나는 ‘한 존재와 다른 존재와의 만남’을 머리로만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과 함께하거나 함께하고 싶었던 ‘활동 목록’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몇 분’에 불과했던 녀석과의 만남이 불러일으킨 변화는 작지만 확실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마당에 나가 눈으로 녀석을 찾았고, 산책길에서 길고양이 무리를 보면 가까이 다가가 녀석인지 확인했다. 마을회관 뒤 유자나무 밑에 음식물 쓰레기를 파묻으러 갔다가 먹을 것을 찾아 땅을 파헤치는 길고양이들을 본 후에는 고양이 사료를 주문, 기도방 섬돌 옆에 물과 사료를 놓아두었다. 녀석이 아니라도 좋았다. 그냥 누구라도 한 끼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우고 가란 뜻에서. 누가 먹고 갔는지는 몰라도 깨끗이 비어있는 사료 그릇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유투브에서 고양이 관련 영상을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집에서 키우는 반려묘들을 중심으로 한 영상이라 아쉬웠지만 나와 다른 종(種)인 고양이들의 소리 언어와 몸짓 언어를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지금껏 해왔던 그 어떤 공부보다 즐겁고 재미있었다.

 

사진=문지온
사진=문지온

녀석을 다시 만난 것은 고양이의 소리 언어와 몸짓 언어에 대해 한참 재밌게 배우고 있을 때였다.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길고양이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먹이를 두고 다투나보다 생각했고 금방 끝날 싸움이라 생각해서 상관하지 않고 있는데 심하게 크르렁대는 소리와 늑대의 하울링 같은 소리가 이어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누구라도 다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인 것 같아 방문을 열고 나갔는데 녀석이 있었다. 저보다 덩치가 큰 하얀 털 고양이를 노려보며.

첫 만남 때의 그 고요한 눈빛과 우아한 태도는 어디에 던져버린 것일까? 앞을 향해 한껏 뻗친 수염과 몸집을 부풀리려 곧추세운 등과 금방이라도 뛰어올라 할퀴려는 듯 사납게 모운 발톱과 보일락말락 입술을 움직이며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흘러나오는 중저음의 길고 반복적인 “우웅-” 소리. 온몸으로 적의(敵意)와 공격성을 드러내고 있는 녀석을 보자 한편으론 실망스럽고 다른 한편으로 감탄스러웠다. 첫만남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깨어진 데서 오는 실망이었고 그 작은 몸과 소리로 지어내는 감정의 순수함에 대한 감탄이었다. 비록 그 감정이 적의에 가득찬 것이고, 밥 한 그릇이나 자기 영역도 아닌 심온재 마당을 자기 영역이라 착각하고 지키려 하는 데서 나오는 공격욕이라 해도 나는 그렇게 밀도 있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온전히 밖으로 표출한 기억이 없었다.

녀석의 기세에 눌려 하얀 털 고양이는 담벼락을 넘어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는 녀석이 긴 꼬리를 직선으로 세우고 도도하게 걸어 하얀 그릇에 가득 채워놓은 사료를 여유롭게 먹고 있는 녀석을 지켜보는데 갓 이사 왔을 때 전(前) 주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심온재 마당에서 화사(花蛇)를 본 적이 있으니 돌담 아래 뱀이 싫어하는 약을 사서 뿌리거나 고양이를 한두 마리 키우는 게 좋을 거라던. 그 말을 들었을 때 반신반의했었다. 지인의 부탁으로 몇 달 고양이 두 마리의 집사 노릇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났던 고양이들은 순하고 느긋한 성품이어서 개구리 한 마리도 못 잡을 것 같았다. 그런데 녀석은 달랐다. 길고양이라서 그런지 야생성이 살아있었고, 하얀 털 고양이와 싸울 때 보였던 기세와 집중력이라면 뱀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슬며시 욕심이 올라왔다. 녀석을 길들여 마당냥이로 앉혀놓고 싶은 욕심. 그러면 녀석은 밥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나는 뱀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녀석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녀석이 지니고 있는 야생성과 적의를 보았으니 ‘요기(Yogi)’라 부를 수는 없어 녀석에게 어울릴 만한 이름의 이미지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는데 눈에 딱 들어오는 게 있었다. 마루에 걸려있는 시계 바늘이 네 시를 가리키고 있는 장면. 오후 네 시!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 중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길들임’에 관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설렐 거야.” 녀석과의 인연을 설명하는 데에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녀석의 이름을 “네시”라 짓고, 서로를 길들여가는 여정에 들어섰다. 앞으로 그 여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얼마나 서로를 바꿔놓을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문지온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하면서 몇몇 문학상을 수상했다. "글을 통해 따뜻함에 이른다"는 뜻으로 필명을 문지온으로 정했다. <남은 자들을 위한 800km>(ekfrma, 2016)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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