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죽기 좋은 날 “고마워요 사랑해요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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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죽기 좋은 날 “고마워요 사랑해요 또 만나요”
  • 한상봉
  • 승인 2016.08.1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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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의 신부], 박기호, 한겨레출판 ‘휴’, 2011.

“죽음의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박기호 신부는 전주교구 김진룡 신부의 영결미사를 다녀와서 글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서품 23년차의 김 신부를 떠나보내며 “가장 정제되고 기품과 능력을 갖춘 사목자로 무르익은 시기인데 훌쩍 불려가게 되었다. 아쉽고 무상한 마음이 너무 공허하다. 목숨이란 물건이 다 그런 것이니......”라고 읇조린다. 


박기호 신부는 3월 중순의 함박눈발이 쏟아지는데, 영결식을 마시고 단양 ‘산 위의 마을’로 돌아가며 추월해 가는 차량도, 가드레일도 차창을 어지럽히는 눈발도 모두 낯설기만 하다고 표현했다. “내가 지금 도로를 달리고 있는지, 하늘을 날고 있는지...... 이대로 이륙해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멀리 회색 하늘 아래 자전거를 타고 손을 흔들며 떠나는 김 신부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신부님, 만나서 좋았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또 만납시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죽고 싶지 않다" 
"죽음에도 품격이 있다"

예수살이 공동체를 창립한 박기호 신부는 지난 2011년 단양 ‘산위의 마을’에 살면서 성찰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어 한겨레출판 ‘휴’에서 출간했다. <산 위의 신부님>이다. 이 책은 책 제목마냥 ‘산 위에 살며’ 겪고 느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의 결정판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의 다른 결정판은 책 말미에 풀어놓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죽음을 마주하는 눈길에 따라서 삶이 어떻게 다시 구조조정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태석 신부의 죽음을 보면서, 박 신부는 “우리 눈에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젊은 한 생을 온전하게 헌신한 이태석 신부를 하늘에 불러 올린 사실만으로도 하느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생각한다. 생의 길고 짧음은 인간의 기준일 뿐, 하늘의 뜻은 따로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쫄리 신부가 선교사로서 최고의 향기로운 꽃을 피우도록 하여 당신의 십자 제단에 분향으로 삼았다”고 새긴다. 

그리고 “나는 중환자실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밝힌다. 박 신부는 언제부터인가 집에서 운명할 수 있는 노부모도 임종 때가 되면 중환자실에 실려가, 참으로 고귀한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호흡기로 연명시키며 가장 고독하고 비참한 종말을 맞게 한다고 안타까와 했다. 박 신부는 “죽음에도 품격이 있다”고 했다. 기품있는 죽음은 ‘선종(善終)’인데, ‘이만 하면 충분하다’고 느낄 때 하느님께서 부르시어 이승을 떠나는 게 선종이라고 답한다. 

어떻게 죽을까? 자발적 단식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의식이 있는 가운데 죽음을 능동적으로 맞이하자는 것이고, 박 신부가 그 방법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 ‘단식’이다. 미국의 스코트 니어링도 100세가 되자 단식으로 생을 마감했고, 간디 후계자인 비노바 바베도 자신이 세운 빠우나 아쉬람에서 그렇게 생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이렇게 조언한다. 

“죽음으로 떠나기에 좋은 시기라는 것을 느낄 때, 이제는 신께로 귀의하겠다는 뜻을 자녀들에게 알려 도움을 받는다. 자녀들은 편안한 침대와 금식에 필요한 우유와 소금을 준비해 놓고 명상에 도움이 되는 분위기를 만들고, 친구와 친지들에게 알린다. 소식을 접한 친구들은 여유롭게 방문하여 추억의 대화를 나눈다. 임종을 하면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만 모여 간소하게 장례를 치른다.” 

그러면 단식 결정은 언제 내려야 할까? 박 신부는 첫째, 타인의 손을 빌려야만 먹고 마시고 배설할 수 있는 상태로 더 이상 병원치료로 호전이 불가능할 때다. 둘째는 자신의 경험이 후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즉 치매가 심해질 때다. 이미 정신적으로 실제적 뇌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내 몸에서 떠나가는 것이 가족과 세상에게 도움이 되는 때라고 판단되면 단식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박기호 신부는 자발적 단식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의식세계를 명료하게 관조하며 떠나는 건강한 죽음이며, 자식들에게는 마지막 정과 사랑을 나누며 헤어지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주어진 생을 자투리 하나 낭비 없이 충만하게 사는 길이라는 것인데, 노구의 노환이 분명한데도 호흡기로 연명하는 것은 타인에게 가야 할 의료의 기회를 빼앗는 것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미련이야 없을 수 없겠지만, 몸부림치면서 가지 않는 게 좋다며, “삶은 구속받지 않을 자유가 있듯이, 방해받지 않는 죽음이라야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즉, 평화로운 죽음을 스스로 설계하는 것은 생의 마지막 권리라고 전한다. 

이를 위해 박기호 신부는 평소 남길 말을 하고 갱신하면서, 유서를 써놓고 종종 함께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산위의 신부님>라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박 신부 자신의 유서를 적어놓았다. <사랑하는 산 위의 마을 가족들에게> 남긴 유서는 스스로 ‘죽음을 두려워 마라’고 타이른다. 

"주님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자, 희망을 잃지 않으며 고난과 슬픔에서 구원받으리라. 
주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자, 굳건히 서리니 기쁨의 순간을 알며 언제 부름 받을지 알고 있으리라. 
주님 앞에서 진실하며 거짓이 없는 자, 곧 선으로 충만한 인생을 맞으리라. 
기도하고 찬양하며 신과 함께 가라. 그리고 선을 행하라. 
천국의 장엄함 믿는 자, 거듭나리라. 
주님에 대한 믿음 굳건한 자, 버림받지 않으리라." 

유서에서는, 때가 되면 단식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찾아와 불러주는 노래와 이야기를 들으며 지내다가 나의 천사를 맞이한다면 이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전한다. 비록 병원에 있는 상태라도 듣고 말할 수 없을 때는 회복가능성 운운하는데 귀 기울이고 갈등할 필요가 없다고 전하며, “아는 얼굴이라곤 아무도 없는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무진 애를 쓰면서 기약 없이 홀로 누워 마지막 고귀한 시간을 허비하게 하는 것은 최악(最惡)이며 죄악(罪惡)”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감사할 일을 감사하고, 용서를 청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며, 이렇게 말하며 떠나고 싶어한다. “모두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 또 만납시다.”(Omnia Dminum! Deo Gratias)  

박기호 신부 (사진=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자료사진)

"이상을 외치는 자가 먼저 죽임을 당하고
뒤따르는 자는 감옥에 가거나 불이익을 당하고,
관망하는 자가 그 열매를 먹는다" 
...그래도 산위의 마을, 이상향을 찾아서

죽음을 보면 삶을 알 수 있는 법, 박기호 신부는 “나는 홍해를 탈출하는 이집트의 ‘하삐루’다. 소비문화라는 파라오로부터 탈출을 감행했지만 배고픔과 사막의 목마름으로 인해 노예생활이 그리울지도 모른다. 애굽의 고기 가마와 야채를 그리워하는 노예들처럼 시시때때로 서울의 삶이 그리울 것”이라고 말하며 2006년 충북 단양의 ‘산위의 마을’로 입촌(入村)했다. 

‘산 위의 마을’은 1998년에 동료사제들과 더불어 설립한 ‘예수살이공동체’에서 2004년에 단양에 세운 공동체마을이다. 예수살이 공동체는 ‘소유로부터의 자유, 가난한 이와 함께하는 기쁨, 세상의 평화를 위한 투신’이라는 정신으로 안티소비문화운동을 전개해 왔으며, 무소유와 노동을 통한 자기수행을 성취하기 위한 구원의 징표로 ‘산위의 마을’을 건설했다. 

박기호 신부는 공동체를 찾아가는 것은 잃어버린 본래의 삶으로 회귀하는 것이라 했다. 오래 전 내 스스로 버리고 떠나왔던 어린 시절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대안(代案)’이 아니라 ‘원안(原案)’의 삶이라 했다. 떠날 때는 미련도 없었지만 다시 가려니 낯가림에 힘들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가야하는 길이었다. 

“변혁의 시대에는 이상을 외치는 자가 먼저 죽임을 당하고, 뒤따르는 자는 감옥에 가거나 불이익을 당하고, 관망하는 자가 그 열매를 먹는다고 했다. ‘공동체주의’는 변혁의 목표를 밝히는 삶이자 모델임이 분명하다. 무소유의 공동체는 우리 시대의 순교의 삶이다. 그래서 광란의 시대에 방주로 인도하는 등대가 된다.” 

그 이상이 너무 높았는지 아직 이 길에 동반하려는 이들은 적은 편이다. 산위의 마을에 살다가 떠난 이웃도 여럿이다. 그러나 경험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공동체생활이다. 자연에 대한 감수성으로 세포가 살아나는 과정이며, ‘함께 걷는’ 소중한 경험이 새로운 생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을 열어가는 게 그리 순탄한 일은 아니었다. “본당신부나 열심히 하지 공동체운동이란 건 또 뭣하는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사진=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자료사진

예수를 살다보니 마주친 동네가 ‘공동체’ 다

박기호 신부는 마흔두살에 늦깍이로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나는 ‘신부이니’ 나를 필요로 하는 부르심에는 기꺼이 응답하자!”고 자신과 약속했다. 그래서 본당사목을 하면서도 노동사목에 동반했으며, 정의구현전국사제단 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이곤 했다. 게다가 <노동의 새벽>을 쓴 박노해의 형이라서 말도 많았지만, 그럴수록 기본으로 주어지는 본당사목에 성심으로 임했다. ‘자기 소임에 불성실하면서 운동하는 데만 쫒아다닌다’는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주임신부는 나의 강론에 대해 ‘노동운동가의 선동연설 같다’는 말도 했다. 두 번이나 그랬을 때 너무 슬프고 모욕적이어서 ‘내 강론의 어떤 부분이 복음적이지 못한지 지적해달라’고 했으나 정작 그는 한마디도 짚어내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서민층인 교우들은 나의 현실비판적인 강론을 좋아했고, 부유한 신자들은 임기 동안 조용히 지내다 가주기를 원했다.” 

'산위의 마을'을 준비할 때도 먼저 자신이 추진하고자 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묻기 위해 ‘마을 건립 청원 천일기도’를 시작했다. 이 일이 꼭 필요한 것인지, 진실하고 순수한 방법인지 묻기 위해서다. 먼저 자신이 100일 기도에 들어가던 일을 생각하며 “신앙인은 지금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정화의 불길에 태워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꼭 마을이 필요하다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이루어질 일이고, 아니라면 애만 쓰고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산 위의 마을’ 이야기를 접기로 하고, 이러한 새로운 실험에 나선 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 한 토막만 전하고 싶다. 박기호 신부는 산 위의 마을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말수 적은 이들과 말이 많은 사람들, 공동체 생활과 자연에 감동한 이들은 말 대신 마음으로 대화한다. ‘이곳은 어딜까?’ ‘어떤 사람들일까?’하고. 그러나 그 느낌이 없는 사람들은 시끄럽다. 공동체 사람들이 이미 버리고 온 ‘세상물정’에 대한 수다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빼놓지 않고 묻는다. “여긴, 평당 얼마나 해요?” 그럴 때마다 박 신부가 답한다. “밟히지 않은 땅은 값이 없는 거여!” 

박기호 신부가 <산 위의 신부님>에 풀어놓은 이야기는 이른바 ‘소비사회’를 사는 이들에게 아직 낯설기만 하다.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 같다. 아마 예수도 당대에는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저러다 저 죽을 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값을 예수는 십자가 죽음으로 톡톡히 치렀다. 그래도 그 길을 가는 삶이 ‘예수살이’ 다. 예수를 살다보니 마주친 동네가 ‘공동체’ 다. 나 너 없이 함께 일하고 한솥밥 먹으며 하느님께로 건너가려는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이다.  

사진=김용길

천천히 어머니를 떠나 보낸다 

덧붙이는 한 마디, 이 서평은 사실 2011년에 쓴 것이지만 여전히 새롭다. 당시 이 글을 쓰면서 나 역시 어머니의 ‘연명치료’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답을 얻지 못하고 있으면서, 박기호 신부의 책을 읽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구순을 앞두고 계신 어머니가 호흡기에 의존하며 중환자실에 누워계셨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시기에 호흡곤란이 왔고,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는 순간 ‘연명치료’는 시작되었다. 폐암에 폐렴이란다. 폐에 가득찼던 물을 빼고, 호흡기로 연명하고 있었는데, 의식이 여전히 명료하고 때로 가뭇거리시곤 했다.  

당시 마음에 가장 걸렸던 것은 정오와 오후 7시 하루 두 번 30분씩 주어지는 면회시간에만 어머니를 뵐 수 있으니, 하루 대부분은 어머니 혼자 낯선 간호사가 간간이 오고가는 것만 지켜보며 누워계시다는 점이다. 우리 가족들은 연명치료를 통해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 두 달 넘어 꽤 긴 영결식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품을 떠난 지 20년이 넘었는데, 이제라도 다시 그분 곁에 서서 손발을 주물러 드리고, 손빗으로 머리를 빗겨드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병실에서 그렇게 오래 어머니 눈을 바라본 적이 있을까, 생각했다. 호흡기 때문에 어머니는 발음하지 못하지만, 연신 뭐라 말씀하셨다. 짧은 시간 맘으로만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어머니는 당신 생애를 접고 하느님께로, 어머니 표현대로라면 성모님께 가셨다. 

오늘은 오전에 시흥동성당에서 봉헌된 박기호 신부님 어머니 장례미사에 참석했다. 김옥순 이멜다 여사. 구순이 넘으신 어머니의 죽음이지만, 자식들에겐 여전히 안타까운 죽음이었을 것이다. 사제인 큰아들과 노동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하고나온 둘째 아들, 그리고 수녀가 된 딸까지 평범하지 않은 가족사 때문에 어머니의 가슴졸임도 크셨던 텐데, 이제 평안히 주님 품에서 안식하기를 기도 드린다. 누군가 "죽음은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든다" 했다. 죽어서라도 평등한 사랑 안에 머무시길 바란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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