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사유하다-벨라스케스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마리아”
상태바
시대를 사유하다-벨라스케스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마리아”
  • 김혜경
  • 승인 2022.12.05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혜경의 명화 속 사유와 현실-5

바야흐로 팬데믹 시대는 물러가고 사람들의 왕래가 시작된 가운데 새롭게 맞이하는 연말연시가 다가오고 있다. 이 시기에 있어 서양에서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는 분위기가 활기차다. 동시에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여파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 주춤하는 기색도 역력하다.

어느 시대나 예언자는 있게 마련이다. 시대의 지성을 대변하기도 하고 선견지명으로 미래를 관망하기도 한다. 환경 문제가 지구적인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팬데믹을 예견한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 때문에 빚어질 에너지와 식량 문제를 제기하며 미래를 비관적으로 내다보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또 새해를 맞게 될 것 같다.

가톨릭교회의 역사에서나 여성사(女性史) 관점에서나, 성모마리아만큼 시대의 예언자적 모습을 보여준 사례가 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된다. 이번 호에서는 1618년, 스페인 세비야 출신의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가 그린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마리아(Immacolata Concezione)”를 통해 며칠 후 맞게 될 축일의 의미를 살피고,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예언자적인 목소리가 되었던 시대를 함께 조명해 보기로 하자.

작품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데, 같은 미술관에 같은 작가의 “파트모스 섬의 성 요한”도 함께 있다. 구세사의 시작과 끝을 말하는 두 개의 그림이 같은 미술관에 있다는 것도 새삼스럽다.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 궁정의 궁정화가로 초상화를 특히 잘 그려 훗날 인상주의와 사실주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가 카라바조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면, 마네는 벨라스케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성모마리아.

1500년대는 종교개혁과 거의 20년간 이어진 트렌토 공의회 및 쇄신 운동으로 교회 안팎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교회가 세상의 칼날을 받았지만, 숱한 성인들이 곳곳에서 나와 방패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교회 안에서는 트렌토 공의회에서 결정한 교의와 전례 개혁에 따라 종교개혁으로 배척당한 마리아와 천사 이야기가 많이 쏟아져 나온 시대기도 했다.

벨라스케스가 있던 시대, 세비야에서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라는 주제를 두고 활발한 논쟁이 있었고, 대중은 거기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어 교회는 공의회에서 결정한 교의적인 내용을 옹호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1613년 레지나 안젤로룸 수녀원의 영성을 담당하던 도미니코 수도회의 도밍고 데 몰리나(Domingo de Molina) 수사가 강단에서 “성모마리아는 당신과 내가 태어난 것처럼, 마르틴 루터가 태어난 것처럼, 아들을 잉태했다”라며, 원죄 없는 잉태를 부인하면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원죄 없는 잉태를 옹호하던 예수회는 프란체스코 파케코(Francisco Pacheco) 신부를 내세워 도밍고 신부를 반박했다. 바로 그 시기에, 논쟁이 정점으로 치달았던 그 시기에, 스페인의 많은 화가는 ‘원죄 없는 잉태’와 관련한 주제의 그림을 수없이 의뢰받았고, 벨라스케스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소개하는 그림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벨라스케스는 예수회의 파케코가 제안한 내용을 넘어, 교의에 더 가깝게 그림을 완성했다. 동정녀의 콘트라포스토 기법의 자세, 발아래에 있는 반투명한 달, 배, 탑, 궁전, 문, 샘 등 성모 호칭 기도문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모든 것들이 마리아를 에워싸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보다 더 전통적이고 교의적일 수는 없다. 구원의 방주, 상아탑, 황금궁전, 하늘의 문, 즐거움의 샘으로 기도하던 것을 떠올리면 된다.

그림 속에서 작가는 현실의 여성을 마리아의 모델로 삼았다. 바비인형이나 비너스와 같은 미모의 추상적인 여성이 아니라, 현실에서 만나는 겸손한 소녀로 표현했다. 사실 파케코 신부가 이상적으로 제시한 마리아의 얼굴과도 매우 달라, 소문에는 화가의 가족 중 한 사람의 초상화라는 말도 나왔다. 맑고 깨끗한 눈, 꾹 다문 입, 연분홍색의 손과 금발로 보이는 긴 생머리를 하고 있다. 그녀를 에워싸고 구름에 감추어진 태양, 후광이 되어 주고 있는 열두 개의 별과 멀리 어두운 밤하늘의 구름 사이로 살짝 보이는 초승달 등은 천문학에 기초한 당시의 우주관을 대변한다. 태양은 마리아를 조명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위치에 두었고, 달은 주변의 풍경을 드러내는 등대로 작용한다.

그림을 통해 그리스도의 탄생이 하늘에 나타난 큰 별(혜성)로 인류에게 첫 이정표가 되었음을 떠올리게 한다. 구세주 오심에 대한 이정표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는 성탄과 직결되어 있고, 인간이 우주를 향해 눈을 열고 마음을 낮추라는 뜻임을 가르쳐준다.

 

김혜경 세레나
부산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