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란, 참 아슬아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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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이란, 참 아슬아슬한
  • 유대칠
  • 승인 2022.11.2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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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칼럼
사진=유대칠
사진=유대칠

'삶’은 결코 쉽지 않다.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해도 항상 좋은 결과가 있으란 법은 없다. 오히려 더 힘들고 더 괴로워질 수도 있다. 그것이 삶이다. 삶은 생각처럼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삶에선 그 어떤 고귀한 진리도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 이런 삶에 뜻을 품지 않는 진리라면 그런 진리가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참 진리라면, 정말 그것이 제대로 된 진리라면, 괴로운 이 삶 가운데 뜻으로 다가와야 할 것이니 말이다.

‘통도사(通度寺)’를 찾았다. 석가모니가 설법하던 인도 영축산과 많이 닮았다 하여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양산의 영축산, 그 가운데 인‘도’ 영축산,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울리던 바로 그곳과 ‘통’한다하여 통도사는 ‘통도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단다. 아마 양산 영축산의 통도사가 인도 영축산의 석가모니와 같이 괴롭고 힘든 이에게 참된 가르침을 전하길 바라는 통도사를 연 자장율사(慈藏律師)의 마음이 드러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통도사에 도착해 처음 만난 건 일주문(一柱門)이다. 어느 사찰에서든 일주문은 두 기둥 나란히 서서 제법 무거워 보이는 지붕을 이고 사찰이 있는 산의 이름과 사찰 자신의 이름이 적힌 현판을 들고 있다. 기둥에 비해 무거워 보이는 지붕을 얹히고 있는 걸 보면 참 아슬아슬해 보인다. 그런데 ‘수행(修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수많은 아집과 그 아집이 만든 크고 화려한 욕심으로 가득한 삶 속에서 그래도 제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참 아슬아슬해 보이지 않을까 싶다. 아슬아슬하지만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고 뜻을 품고 살아감, 그것이 일상 속 우리의 수행이 아닐까 말이다. 대단해 보이지 않은 기둥으로 큰 지붕을 이고 있는 일주문, 그 일주문 앞에서 나를 돌아본다. 흔들흔들 아슬아슬하지만 그럼에도 뜻을 품는 나를 돌아본다. 그럼에도 뜻을 버리지 않는 나를 안아준다.

아슬아슬하지만 뜻을 품고 살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나 자신이 나에게 마구니가 되어 찾아온다. 욕심 가득한 마음 조금이라도 비우면 다시 나 자신이 나에게 마구니가 되어 채우자고 유혹한다. ‘천왕문(天王門)’은 무서운 얼굴에 마구니를 발 아래 깔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증장천왕(增長天王), 광목천왕(廣目天王), 다문천왕(多聞天王) 이렇게 사천왕(四天王)이 서있는 문이다. 마구니로부터 사찰을 지키겠다며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문에 있는 거다. 그런데 지금 사찰에 들어가는 이는 다름이 아닌 나 자신이다. 어쩌면 나 자신이 지금 저 사천왕의 발 아래 깔려있는 마구니인지 모른다. 비우지 못하고 채우며 살아가는 아집덩어리말이다. 사천왕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부족한 나를 돌아본다.

 

‘일주문’을 지나고 ‘천왕문’을 지나 이제 ‘불이문(不二門)’에 이른다. 이 문은 조용히 “둘(二)이 아니다(不)”라는 말을 나에게 던진다. 갑자기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한문으로 옮긴 쿠마라지바의 말이 떠오른다. ‘번뇌시도장(煩惱是道場)’, ‘번뇌’야 말로 ‘깨우침’의 자리란 말이다. ‘번뇌’와 ‘깨우침’은 결코 그 자리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다. 번뇌의 자리에 있지 않은 깨우침이 무슨 깨우침이겠는가! 괴로운 이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는 깨우침이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정말 제대로 뜻을 품은 깨우침이라면, 그 깨우침의 자리는 번뇌어야 한다. 그 깨우침의 자리는 번뇌의 자리와 다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자리에 수행의 삶도 있는 거다. 수많은 번뇌 가운데 괴로워하지만 그럼에도 아집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지금 이 부족한 이의 모습, 아슬아슬하지만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는 일주문 같은 그런 모습, 천왕문의 사천왕 앞에서 아직 비우지 못한 아집을 부끄러워하며 다시 자신을 돌아보고 돌아보는 모습, 번뇌의 자리와 깨우침의 자리가 다르지 않는 바로 그런 모습이 수행의 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불이문을 지나 이제야 통도사의 대웅전(大雄殿) 앞에 섰다. 다른 사찰의 대웅전과 너무나 많이 다른 독특한 모습,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놓인 ‘적멸보궁(寂滅寶宮)’답게 불상은 없다. 대신 석가모니 진신사리(眞身舍利) 사리탑이 대웅전 담 넘어 있다. 인도 영축산에서 설법하던 석가모니는 지금 사리가 되어 양산 영축산 통도사에 그렇게 머물고 있었다. 허나 나에게 정말 귀한 시간은 사리탑을 마주한 시간보다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을 지나 대웅전에 이르는 길지 않은 길을 걸으며 나를 돌아본 시간이었다. 번뇌의 자리와 깨우침의 자리, 부처의 자리와 중생의 자리가 다르지 않음을 깨우쳐 가는 그런 시간이었다.

 

욕심을 가르치는 세상, 비우지 말고 채우고 또 채우라는 세상, 그 욕심과 그 채움 가운데 힘겨워하지만 그럼에도 더 욕심내고 더 채우려는 지금, 일주문에서 천왕문을 지나 불이문에 이르는 통도사에서의 시간이 참 귀하다. 오늘도 비우고 비워야겠다. 다시 채우고 채워진다 해도, 이 아슬아슬한 수행의 삶을 살며 다시 비우고 비워야겠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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