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철폐한 걸 복원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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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철폐한 걸 복원하는 교회
  • 최태선
  • 승인 2022.11.22 0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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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오래 전 들었던 이야기이다. 책에서 본 내용이기도 하다.
신자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주장을 했다. 한 사람은 기도할 때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했고, 다른 사람은 기도할 때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주장을 했다. 두 사람은 신부님을 찾아가서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를 물어보기로 했다.

기도할 때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했던 사람은 신부님을 찾아가 이렇게 질문을 했다. “신성한 기도 시간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신부님은 기도 시간에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대답을 했다.

두 번째 사람은 이렇게 질문을 했다.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도 기도를 할 수 있나요?”
신부님은 기도는 언제든 할 수 있다면서 담배를 피우며 기도를 해도 된다는 대답을 했다.

각각 신부님을 찾았던 두 사람은 돌아와 만나면서 똑같이 “보라고 신부님이 자신이 옳다”고 했다는 말을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 이야기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라. 나는 이 이야기에서 잘못된 것이 신자들이 신부에게 찾아가 질문의 답을 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결론을 도출해내지 못했을까.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자주 일어난다. 특히 갈등이 불거질 경우 신자들은 교회의 성직자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성직자자가 중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중재가 아니라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각자의 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결국 신자들간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거나 성직자의 명령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신자들은 단독자로서 하느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들이 된다.

오늘날 신자들은 자신들이 평신도라고 불리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평신도가 아니라 “병신도”라는 말을 하면서도 평신도라는 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것은 이미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가 그리스도교의 공고한 상층계급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인사제’의 기치를 내걸었던 개신교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현실적으로는 동일한 입장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재속수도자’ 되거나 제자훈련을 통해 평신도를 깨워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평신도라는 그들의 신분 자체가 바뀌거나 무의미해지기 전에는 다른 어떤 시도도 무의미하다. 개신교의 경우는 평신도가 깨어나서 신학교에 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평신도가 성직자가 되는 것이지 평신도가 깨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의 경우는 수사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만인사제’라는 개신교의 구호는 허망한 주장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이 계급구조(Hierarchy)가 철폐되지 않는 한 복음은 복음으로서 작동될 수가 없다. 하느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한 나라이다.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없다. 높은 사람은 낮아지고, 낮은 사람은 높아져서 모두가 평등해지는 곳이다.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서 스스로 그렇게 되려는 노력을 멈추면 하느님께서 그 일을 하신다.

“그는(하느님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마리아의 찬가에서 울려 퍼지는 하느님 나라의 생생한 모습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모두가 평등해지는 곳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모든 사회적 장벽들을 철폐하셨다. 유대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장벽은 세 가지였다.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노예, 여성과 남성의 차별이 그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 장벽들이 철폐되었다고 선언한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죄인으로 분류하던 세리와 창녀와 장애인과 환자들과 만나셨다. 이들은 사회적 장벽으로 막아 놓지 않아도 이미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로 분류된 부정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만나신 이유가 무엇인가. 유대인의 전통은 우리 문화와 비교할 수 없는 ‘유유상종’이다. 만일 유대인이 죄인들을 만난다면 그는 죄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형제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함께 같은 식탁에 앉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든 사회적인 장벽들을 철폐하셨던 것이다.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본을 따랐다. 하지만 교회가 커지고 조직화되어가면서 철폐되었던 사회적 장벽들이 다시 구축되기 시작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필두로 사제직이 복원되었다. 그것이 바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다. 유대의 사제와 나머지 유대인들의 구분은 계급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계급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saeculum)에 속한 일을 하는 신자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교회의 교사들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 그들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 평신도는 그들의 일을 통해 사회가 기능하게 하는 데 필요한 일을 수행한다.… 그들의 일은 교회에게 중요하다. 그들의 수입이 교회의 필요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그들의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길이 어떻게 그들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켜 다른 이들을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앨런 크라이더,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 감광남 옮김, Ivp, p.477-478)

벌써 내가 여러 번 인용한 내용이다. 그만큼 이 내용은 중요하다. 이 내용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평신도의 정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의 평신도들은 결코 주체적인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이 글에서 말하는 교회의 교사(성직자)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평등하지 않다. 그리고 모두가 평등하지 않은 하느님 나라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가지는 한계이다.

내가 이 내용을 강조하는 것은 처음에 언급했던 가톨릭신자들이나 문제가 불거지면 목사를 찾아가는 개신교 신자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조직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라는 것이다. 오늘날 성직자를 제외한 신자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주체가 될 수 없는 신자들은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성직자들 역시 그런 평신도들이 존재하는 한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하느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고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신자들은 평화를 도모할 수가 없다. 근본적으로 주체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되었기 때문이다.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갈등 하나로 갈라서야 하는 사람들이 되었는가.
왜 당사자들이 대면하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가.
왜 교회가 평화를 만들어내지도 보이지도 못하는 곳이 되었는가.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교 안에 엄연한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는 평화교회가 되어야 한다. 평화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평등한 주체로서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들만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갈등을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할 수 있다. 복음은 이런 평화교회 안에서만 복음이 될 수 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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