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파도에도 노래를 부르는 몽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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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파도에도 노래를 부르는 몽돌이 되고 싶다
  • 최태선
  • 승인 2022.11.15 0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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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내가 산에 갈 때 입는 복장은 편리하지만 대부분 허름한 예전에 입던 옷들이다. 어떤 때는 산에서 사람과 마주치지 않았으면 싶을 정도로 허름하게 입고 가는 적도 있다. 지난 번 이사하기 전 많이 버렸지만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옷 가운데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들도 많았다. 어떤 옷은 보기만 하면 그 나이를 알 수 있는 옷들도 있다.

예를 들어 88올림픽을 기념하는 옷과 같은 경우이다. 그런 경우, 따져보면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그런 옷을 입으려면 내가 아직 덜 달관해서(가난해져서) 그렇겠지만 조금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래 전 내가 입던 거의 발목까지 오는 긴 트레이닝복을 정성껏 다듬어서 산에 사시는 노숙자 선생님에게 갖다 드린 적이 있다. 내 생각에는 밤에 긴 그 옷이 이불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옷이 산에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헌 옷도 아니었다. 솔기가 튿어진 것을 거의 반나절이나 정성껏 꿰매서 갖다드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버려진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분들도 시간이 오래 지난 헌옷은 입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오래 시간이 지난 옷을 꺼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변명이다. 아직 가난하지 않은 증거라는 걸 이렇게 합리화하고 있다.

어쨌든 늘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기 때문에 산에서 누구를 만나는 것이 늘 꺼려졌다. 특히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면 늘 인사를 한다. 여자분이 혼자인 경우는 상황을 봐서 인사를 한다. 혹 무서워하는 기미가 보이면 인사를 하지 않고 더 빨리 지나치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중년의 여성이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내게 “혹 목사님 아니세요?”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유명한 목사가 아니다. 특히 나는 지금까지도 내 사진을 어디에도 올리지 않는다. 다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는 경우에도 가급적 올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이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분이 나를 보고 목사님이시냐는 질문을 한 것이다. 나도 인사를 한 후에 그분에게 왜 제가 목사냐는 생각이 드셨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분은 내 인상이 인자하게 보였다고 했다.

지금이라면 그것을 그리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천지 아이들이 포교를 할 때 그런 말을 상투어처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분은 내게 신천지 포교를 하지 않았고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나는 늘 지성적이거나 똘똘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지만 인자하거나 유순해 보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내가 정말 그렇게 선하게 보이는 인상으로 변했는지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어쩌면 성령께서 내게 힘을 주시기 위한 작은 해프닝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내가 유순하다는 말을 거의 듣지 못한다. 나는 날카롭고 예리하다. 그것이 천성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내가 아직 미성숙한 신앙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위선이 아니고, 가식적인 표정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유순함은 영성의 바로미터이다. 성서에서는 그것을 온유함이라고 표현했다.

“예수회 사제이면서 정교회 영성에서도 영감을 얻는 마르코 이반 루프니크는 우리를 경청이라는 영적 태도로 인도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건설적인(그냥 수동적인 게 아니라) ‘유순함’으로 빚어진다. 루프니크는 겸손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영적, 신학적 의미에서 겸손한 사람은 자기한테서 확실히 의지할만한 것을 전혀 얻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확실한 것이란 주께서 그들 안에 부어주신 사랑뿐이다. 주께서는 그들 안에 말씀을 기록하셨고 그것으로 신비롭게 그들을 다시 살리셨다.”(마르바 던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윤종석 옮김, 엔 크리스토, p.68-69)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신앙의 길에서 유순함으로 드러나게 되는 겸손은 정말 중요하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나는 유순한가. 생각과 달리 우리는 유순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들려오는 세상의 소리가 모두 우리에게 날카로울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의 말을 보라.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지독한 말을 생각해낼 수 있는가. 당대표가 되고, 대변인이 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라. 나는 그들이 꽈배기 공장 사장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이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지독한 말들을 정말 교묘하게 사용하여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비난한다. 우리는 날마다 그런 말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도 그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들은 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지독한 말을 하는 자신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점점 더 창의적으로 지독한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불쌍하다.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되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표가 된 것도 대변인이 된 것도 그들에게 불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그들은 성공한 사람들이고 멀쩡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을 맡긴 결과는 그런 지독한 말을 하는 괴물이 된 것이다.

신앙은 우리를 유순하게 만든다. 노숙자 선생님들을 만나면 나는 웃으면서 그분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최대한 친절하게 말하고, 그분들을 대접한다. 이 일이 나를 유순하게 만든다. 노숙자 선생님들을 보면 인상을 찌푸리거나 피해서 가는 분들은 내가 느끼는 따뜻함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내 행동이 나를 변화시킨다. 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내 내면의 결과이지만 반대로 행동이 내 내면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조금씩 유순해져 가고 있다.

마르코 이반 루프니크가 한 말을 나는 공감한다. 겸손이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지어내는 위선과는 정 반대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힘을 가져야 겸손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겸손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힘에 의존하는 교만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어쩌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한테서 확실히 의지할만한 것을 전혀 얻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생각나는가. 힘없는 사람의 대명사는 어린아이이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의지하지 못한다. 요즘 나는 손자를 데리고 공원엘 가곤 한다. 나는 녀석을 용감하게 키우고 싶다. 그래서 녀석에게 무엇이건 가능한 혼자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녀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히 구분한다. 그리고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주저 없이 “하비비가”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하라는 의미이다. 또 그것은 할아버지는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은 이처럼 겸손해지라는 것이며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길에서 힘을 버리는 것은 신앙인의 필수적인 과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힘을 버릴 수 있는가. 가장 먼저는 가난해지는 것이다. 가난해지면 힘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다음은 각종 고난에 처하는 것이다. 고난은 우리의 무능력함을 드러낸다. 그 무능력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고 의지하고 비로소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난은 친구를 시험한다는 말을 한다. 고난은 실제로 하나님과 친구를 시험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가 겸손해지는 것이다. 겸손해지면 우리의 사는 방식이 비로소 달라진다. 매사에 왜냐고 묻던 우리들이 우리가 겪는 인생을 통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를 찾게 되고, 어디에 하느님의 뜻이 있는가를 헤아리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표정과 삶의 방식에서 우리는 유순함을 발견하게 된다.

겸손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인생의 毒(독)을 맞아 썩지 않고 발효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보호하심이며 은총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겸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인생을 유순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이젠 몽돌처럼 동그란 작은 돌멩이가 되는 것이 내 꿈이다. 그렇다. 나는 거친 파도에도 노래를 부르는 몽돌이 되고 싶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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