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은 홀로코스트에서 대량으로 학살된 시체를 처리하는 유태인 일꾼이다. 그가 처리하는 시체들은 하나의 폐기물일 뿐이다. 시체는 단지 고깃덩어리이고 나무토막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은 시체를 ‘토막’이라고 부른다. 사울의 얼굴에는 공포와 순응, 그리고 관료적 성실함이 복잡하게 겹쳐있다. 죽은 자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를 거두고 그 안에 있는 귀중품을 분리수거하는 일, 가스실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배설한 분비물을 닦아내는 일, 그리고 토막(시체)들을 옮기는 일을 반복하는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살아 있으나 사실은 죽은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시체를 처리하는 반복되는 노동 가운데 그를 변화시키는 한 사건이 일어난다. 감정이 없이 무표정한 얼굴에 표정이 생기고 의식이 돌아온 환자처럼 생기가 돋는다. 주검 가운데 아들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사울은 아들의 시신을 숨긴다. 아들의 시신을 나무토막처럼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수용소 내 어딘가에 있을 랍비를 찾아 헤맨다. 아들의 주검을 종교적 절차를 거쳐 매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아들의 죽음에 대한 최선의 인간적 배려이고 죽음을 대하는 인격적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랍비를 찾으러 다닌다. 영화는 관객에게 표정 없이 반복되는 사울의 무모한 행위를 통해 점차 죽음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그런데 뒤집어보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삶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서 사울이 집착하고 있는 시신이 실제로는 사울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사울에겐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사울은 자기와 무관한 타인의 시신을 자기 아들로 인식했던 것일까. 그것은 나무토막 같은 수많은 시체를 생각 없이 처리하는 과정에서 삶에 대한 자각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타인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고 내 아들의 죽음처럼 영혼을 찌르고 들었던 것이다.
며칠 전 10.29참사 희생자들의 시신이 순천향병원 영결식장에 짐짝처럼 널브러진 사진을 보았다. 희생자들의 죽음이 처리되는 과정이 어쩌면 홀로코스트 같다는 생각이 섬뜩하게 들었다. 희생자의 빈소에는 사망한 이의 이름도, 위패도, 영정도 없었다.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는 빈소에 국화꽃 무더기만 쌓여 있었다. 애도의 뜻을 나타내는 ‘근조(謹弔)’ 리본조차 글씨를 숨겼다. 영정도, 위패도 없는 빈소에서 거짓으로 조문하고 거짓으로 애도한 것이다. 그곳에 조문한 사람들은 국화꽃 무더기에 절하고 조문한 꼴이다. 이것이 윤석열과 그 일당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과 너무 닮았다. 이 정부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야만적이고 비인격적이다. 오직 자기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서 은폐하고 조작하며 거짓말로 눙치는 데 에너지를 쏟을 뿐이다. 애통하게 죽은 사람들에겐 일말의 책임감도, 인간으로서의 공감도 없는 야수들이다. 죽음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역으로 산 사람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개 눈엔 똥밖에 안 보인다는 속담처럼 검사 눈엔 모든 사람이 잠재적 범죄자이고 처벌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개에게 나라를 맡겼으니 지금 이 나라 시민들은 모두 똥이 된 것이다. 개의 편에 서지 않으면 우린 모두 잠재적 범죄자이고 처벌의 대상일 뿐이다. 그것이 무서워서 언론이라는 것들은 다들 개소리를 낸다. 나라가 개판이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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