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알거나 조금밖에 모르는 선무당이 판치는 교회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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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알거나 조금밖에 모르는 선무당이 판치는 교회와 세상
  • 최태선
  • 승인 2022.11.0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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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SBS뉴스
사진출처=SBS뉴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들은 이미 답을 다 알고 있다. 선무당이다. 선무당은 사람을 잡는다. 그러면 선무당은 왜 사람을 잡을까? 그 답도 이미 알고 있다. 선무당은 조금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선무당에게 사람을 망칠 기회를 줄까? 선무당이 조금 안다는 사실을 선무당은 물론 선무당을 찾는 이들 역시 모르기 때문이다.

작금의 현실이 그 생생한 예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거 전부터 천공이라는 사람이 굥 주변에 등장했다. 그리고 이번 이태원의 비극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는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는데도 그것을 미래를 위한 발전의 기회로 보았다.

내 생각이다. 하지만 그는 선무당이다. 큰 무당은 그렇게 어처구니없지 않다. 몇 년 전 나는 <귀향>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영화에서 큰 무당을 보았다. 큰 무당이 오늘날 목사들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다. 큰 무당은 한을 품고 죽은 영혼은 물론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렇다. 문제가 되는 것은 조금 아는 것이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그런 조그만 차이가 절대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천공과 같은 선무당도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선무당이 지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천공보다 더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사실 무당이 정치판에 존재한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극을 보라. 그곳에는 반드시 영험한 무당이 등장한다. 그러나 영험한 무당은 사실 보기 어렵고, 선무당들이 날뛰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물론 역사를 아는 이들은 그들이 어떻게 혹세무민하는지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정치판에 그런 선무당들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실제로 정치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란 본디 옳고 그름이 없다. 정치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하는 게임이다. 거기서 선무당은 큰 역할을 한다. 오히려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는 그들이야말로 가장 정치판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을 이용해서 이긴 정치가들의 말로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물론 자신이 가지게 된 힘으로 지배하게 된 사람들 역시 죽이게 된다. 그래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선무당은 죽음의 굿판을 벌리게 된다. 우리가 본 이태원 참사 역시 그런 죽음의 굿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모든 세상과 모든 역사의 문명들은 희생의 체제이다. 강자들의 이익을 위해 약자들이 희생하는 구조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발전된 정치는 그런 정치의 한계를 많이 극복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강자들이 통치하는 ‘희생의 체제’라는 구조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선거라는 선택의 시간이 희생을 줄이는데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에 보고 있는 것처럼 다음 선거를 기다려야 하고, 그동안 ‘희생의 체제’는 더 많은 희생을 낳더라도 어쩔 수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희생의 체제 속에서는 오히려 선무당과 같이 조금 아는 사람들이 득세를 하기 마련이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가 근본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그러한 세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희생양이 없는 오직 유일한 나라로서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런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고 드러내보여야 할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과연 어떤가.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속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복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의 자유와 함께 부자가 된 교회 속에서 성직자들이 세상의 대인들처럼 다스리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파된다. 하지만 부자가 된 교회에서 성직자들은 가난한 자로 살지 않는다. 아무리 청빈을 모토로 내세워도 근본적으로 변질된 그리스도교에서는 가난이 작동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가장 존경하는 신앙인 중에 한 사람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들었다. 그는 자신이 사제가 되고 추기경이 되었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성서가 말하는 가난은 하느님 이외에는 희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근본적으로 그런 가난에 내몰리지 않는다. 그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는 한 부자가 된 교회 속에서 그들은 가난한 자로 살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구조 자체가 변한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교회는 더 가난해야 하지만 부자가 된 교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쫓겨나는 구조로 변한다.

가난은 복음의 뇌관이다. 가난이 사라진 그리스도교 안에서 복음은 결코 작동 될 수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그리스도교를 전부로 알게 되었다. 그런 그리스도교 안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나라를 상상할 수 없다. 성직자들 역시 그러한 한계를 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교회 역시 조금 아는 자들이나 자신이 조금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득세하는 곳이 되었다. 교회 안에서도 성공하고 실패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교회 안에도 경쟁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아는 것이 힘인 세상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능력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글을 계속해서 쓰는 이유 역시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현실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그러나 비능력이 가지는 한계는 근본적으로 비능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작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도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끝나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시작된다. 비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작동시키는 촉매제이자 뇌관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서 복음의 폭발력이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누구라도 자신이 아는 것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조금 알거나 알게 되는 것보다 천 배나 만 배나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을 경쟁적으로 선택하고 모신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교 역시 세상과 다르지 않은 ‘희생의 체제’로 만든다. 정말 슬픈 일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세상처럼 ‘희생의 체제’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왜 교만한 사람들이 되는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왜 교회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있는가. 왜 부자들이 주도하는 교회가 되었는가. 왜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교수이자 박사인 목사들로 채워졌는가. 하느님 나라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한 적게 알건 많이 알건 선무당처럼 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들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리스도교의 지도자가 되었고,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향하여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실 수밖에 없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당신도 조금 아는 사람인가. 지금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한 때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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