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내 사업 파트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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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내 사업 파트너인가
  • 김선주
  • 승인 2022.11.01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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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사진출처=phyleaspace.tumblr.com
사진출처=phyleaspace.tumblr.com

사람들이 간혹 그런다. 나중에 잘 되면 보자고. 그 때 크게 한 턱 쏘겠다는 것이다. 교회에도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내가 하는 사업이 잘 되게 기도해 달라고. 사업 잘 되면 교회에 크게 헌금을 하거나 헌신할 것처럼 말한다. 난 그런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가 가진 신앙도 신뢰하지 않는다. 내 사업이 잘되기 위한 조건으로 하느님과 관계 맺는 태도는 신앙을 가장한 투기행위다. 하느님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 아니 요즘 교회의 신앙 패턴이 그렇게 됐다. 교회가 조건부 신앙의 대리 기관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앙 패턴은 이미 경제학에서 있었던 논리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이 유행의 사회적 파급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한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 이론을 미국의 경제학자 아서 레퍼가 ‘레퍼 곡선’으로 만들어 시장경제를 절대시하는 논리로 발전시켰다. 재벌과 대기업의 규제를 풀어주어 더 많은 자유를 주고, 세금을 감면해주면 그들의 부가 성장하여 그 부스러기가 하부구조에 미쳐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다는 논리다.

취임식부터 시작하여 가는 곳마다 연설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떠드는 윤석열 대통령의 그 ‘자유’는 사실 시장경제의 자유라는 내시의미를 담고 있다. 부자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정책들이 이미 그러한 맥락을 보여주었다. 법인세 감세, 다주택자 종부세 중과 폐지, 주식 양도세 감세 들을 과감하게 밀어붙이고 있지 않은가. 그 대가로 사회적 약자에게 지급되는 복지비용을 대폭 삭감해 버리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낙수효과는 발생하지 않았다. 특히 레이건 정부가 이 레퍼 곡선(낙수효과 이론)을 믿고 경제정책을 폈다가 폭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후로도 여러 나라에서 낙수효과 이론을 토대로 시장주의 정책을 폈지만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재벌이 더 많은 돈을 벌고 대기업이 성장하면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는 생각은 모두 빗나갔다. 기업은 고용을 늘리기보다 자동화 시스템으로 전환하여 오히려 고용을 감소시켰고, 재벌은 탈세와 탈법을 통해 수익구조를 더 악랄하게 바꾸어 자기 이익을 극대화했다.

그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고용이 늘어났고 빈부 차이는 더 커졌다. 그리고 노동의 질은 더 낮아졌다. 한국 사회는 사람을 갈아 넣어 생산력과 효율성을 높이는 구조로 변질되어 갔다. 그렇다, 사람을 인격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갈아 넣어 상품을 만들어내는 원료로 인식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삶은 망가지고 영혼(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그런데 이런 경제 이론이 교인들의 신앙 패턴에도 그대로 접목된 것을 본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하느님의 선한 일을 하겠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엔 함정이 있다.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신앙을 퇴행시켜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 결과로 모든 것이 선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어느새 신앙 안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 강남의 부자 교회에서 시골의 작은 교회나 해외에 선교를 많이 하면 그 교회를 선하게 보는 것이다. 대형교회가 분리 개척을 하면 사람들이 그 결과를 보고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부자동네의 대형교회 교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부를 축척했으며, 그 과정이 기독교적 가치와 부합했는가는 묻지 않는다. 또 부자동네의 대형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치되고 하느님의 정의에 부합하는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강도질을 해서라도 누군가에게 선을 베풀면, 그 결과만으로 선하다고 믿는 것이다. 마치 이제 입을 막 뗀 어린 아기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하고 묻는 격이다. 아직 인지능력이 발달하지 않은 아이는 뒤에 오는 이름, 즉 최종적으로 귀에 들린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에 답하기 쉽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대한 인지능력이 지금 그 수준이다.

그러니 교회와 교인들이 하느님을 사업 파트너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내 사업을 밀어주면 난 돈을 많이 벌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선한 사업을 하겠다는 심보다. 그 과정에서 불법과 탈법, 탈세, 사람을 갈아 넣는 노동의 강도, 비인격적인 경쟁 구조, 저임금 같은 문제를 유발하는 것에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돈 많이 벌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절대적 기준이 된 것이다. 하느님의 정의(공의)와 예수의 사랑과 희생은 영적(관념적)인 영역으로 분리시켜 그것을 현실과 무관한 것으로 치부한다.

교회에서 ‘영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은 ‘자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윤석열과 같은 영적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뭘 모를 때, 그럴듯한 관념어를 사용하기 좋아한다. 그러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영적이란 말과 자유란 말이 그렇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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