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도 친구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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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친구가 필요해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9.2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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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5)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딱 두 군데 장면에서 눈물을 보입니다. 한 번은 예루살렘 성전의 운명을 예감하며 우셨고, 또 한 번은 나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는 공적인 눈물이었고, 또 하나는 사적인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2-44)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비극적인 운명을 안타깝고 눈물겹게 바라봅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그 백성들이 참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은 ‘공인’(公人)입니다. 어떤 이는 인류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예수님이 과월절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왕, 주님이라고 부르는 게 옳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공식적인 호칭 뒤에는 예수님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호산나, 우리 주님”이라고 부르는 군중들 앞에서, 어쩌면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예수님은 “아니, 그게 아니라...” 하고 변명조차 할 틈이 없어 보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가며,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도, 그런 이야길 듣고 싶어 하는 신앙인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그분은 구세주가 되어야 했고, 당연히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우리의 부족함을 자비로이 채워주어야 할 메시아로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분이 자기 자신을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래야 교회도 그분처럼 종교적 권위를 함께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예수님을 닿을 수 없는 아주 높은 곳에 올려놓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외롭게 현기증이 일었던 예수님은, 지금 천상옥좌에서 고독한 유폐를 거듭합니다.

예수님은 거듭 새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1)고,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고 강조하였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무조건 섬기려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고 하였으나, 사람들은 그분을 한사코 ‘주인/주님’이라 부릅니다.

급기야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고 하였으나, 사람들은 모든 영광과 지고지선(至高至善)을 그분께 돌리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하중을 견디려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놓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by Karl Schmidt

예수님에게도 아픔이 있고, 무력함을 느낄 때가 있으며, 슬픔과 고뇌로 무너질만한 상황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분이 겟세마니에서 공포와 번민에 휩싸여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마르 14,34) 하고 말할 때, 우리는 겨우 그분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그에게 친구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모든 흠결에도 불구하고 위로할 줄 아는 손길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복음서를 아무리 뒤져봐도 제자는 있을지언정 친구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수난예고를 연거푸 하시는 순간에도 자리다툼을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달아나 버립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한 것은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메시아다운 힘과 당당함이었겠지요. 이게 예수님 같은 공적 인간이 지닌 딜레마입니다.

예수님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예수님과 그 일행들에게 기꺼이 거처를 내어준 사람은 라자로입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포함한 라자로의 가족들과 깊은 친밀감을 나누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마지막 길을 떠나는 예수님을 기억하며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존경과 사랑을 담아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 12,3)고 합니다. 적극적인 환대를 예수님께 베풀었던 사람들입니다. 은밀하게 예수님을 뒤에서 돕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복음서 어디에도 라자로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라자로는 예수님의 동무이며, 도반이며, 동지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대의명분보다 예수님을 그분 그대로 사랑했던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만일 예수님에게 라자로와 그 가족들이 없었다면, 그분이 자신에게 주어진 엄청난 삶의 무게를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지 아득합니다. 라자로에게 고맙고, 그 가족들이 사랑스럽습니다. 복음서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요한 11,3)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11,5)는 말도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라자로가 죽었을 때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11,11)고 말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사랑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은 평등한 관계 안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의 제자에서 예수의 친구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분의 생각을 배우고 따라 살면서 어느덧 그분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이제 그분의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그분의 동지이며 도반이며 동무가 되고, 이윽고 연인이 된다면 그분의 빛과 더불어 그늘조차 사랑하게 되고, 진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 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여기선 이걸 ‘추앙’(推仰)이라고 부르더군요. 염미정의 인생은 “구씨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뉠 것 같다.”는 말도 합니다. 그리고 “나 미쳤나봐.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마음에 사랑밖에 없어. 그래서 느낄 게 사랑밖에 없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친구로 만나 동반하며, 그분을 만나기 전과 사뭇 다른 오늘이 시작되면 좋을 듯합니다. 

 

* 이 글은 <가톨릭일꾼> 종이신문 2022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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