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만찬, 즐겁게 먹고 마시는 게 주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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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만찬, 즐겁게 먹고 마시는 게 주님의 뜻
  • 김선주
  • 승인 2022.09.2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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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예수는 먹는 것을 탐하는 자였고 세리와 창녀의 친구였다. 그게 당대 종교 권력자들이 예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끔찍할 정도로 정결의식을 강조하던 자들에게는 예수가 더럽고 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의 전통 가운데 내재된 종교 이데올로기의 시각이었다. 그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는 소프트 파워가 ‘사랑’이었다. 예수의 ‘사랑’은 권력화된 종교 도그마를 파괴하려는 가장 인간적인 노력이었다.

그 사랑은 이념 지향성을 포기한다.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있다. 존재를 향해 있다. 사랑은 존재의 기쁨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복음을 선포한 후에는 먹는 이벤트가 뒤따른다. 먹는 것은 사랑의 방법이며 존재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선포하는(가르치는) 일과 먹는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동시에 먹는 즐거움을 누렸다. 예수가 가는 곳에는 먹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것이 예수의 사랑이었다.

그렇다고 예수가 값비싼 음식을 풍족하게 먹진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과 거친 음식을 소박하게 나누었을 뿐이다. 예수는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에 초점을 맞추었다. 무엇을 먹느냐는 사회적 신분과 계급을 표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무엇’은 당파성이며 계급을 표상하는 명사다. 그러므로 예수의 ‘어떻게 먹느냐’는 ‘무엇을 먹느냐’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한다. ‘어떻게’는 사랑과 직결된다.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귀착된다. 예수의 식탁은 기쁨과 즐거움의 자리였다. 비싸고 풍성한 음식이 아니라 함께하는 이들과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것이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보여준 지금, 여기의 하느님 나라다.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90,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우리는 예수의 ‘마지막 만찬’에서 값비싼 뷔페 같은 성찬을 떠올린다. 우리말로 ‘만찬’이란 말이 그런 뉘앙스를 갖게 한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명한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도 그러한 뉘앙스를 갖는다. 하지만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음식은 풍성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소박한 음식들로 차려져 있다. 그런데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설정한 공간 구조와 식탁의 배치를 보면 매우 의례적이다. 날카로운 선과 정형화된 공간, 질서정연한 식탁 배치, 그리고 제자들의 정결한 복장을 보면 만찬 자리가 엄숙한 종교적 의례를 행하기 위한 공간으로 설정된 것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이 벌이는 논쟁의 긴장 가운데 예수는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초월적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극히 종교적 도그마를 함의한 그림이다.

하지만 거의 동시대에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던 야코포 바사노는 전혀 다른 톤으로 같은 그림을 그렸다. 만찬 자리는 밝은 빛이 없는 협소한 공간이다. 빛과 어둠이 대조를 이루는 좁고 침침한 방에서 지금 막 밥과 술을 먹고 나른한 모습으로 흐트러진 상태다. 마치 술 취한 자들의 주막집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방종과 나태함, 버릇없음, 그리고 노동자의 근육질이 식탁 주위에 날것으로 드러나 있다. 식탁 아래로는 아예 신발을 벗고 있으며 강아지조차 나른한 잠을 청하고 있다. 이런 비격식적인 만찬이야말로 예수님이 즐기던 자유와 방종의 식탁이며 기쁨의 정취였다. 하지만 바사노는 예수의 시선을 명료하게 정면을 응시하게 함으로써 그 자유와 방종의 기쁨이 방탕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 야코포 바사노, 1542년–1546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보다 바사노의 <최후의 만찬>이 훨씬 성서에 가까운 그림이다. 다 빈치는 예수를 초월적 종교지도자로 보았다면 바사노는 예수를 기쁨을 나누는 친밀하고 신실한 타자로 보았던 것이다. 예수의 식탁을 종교적 도그마로 본 것이 아니라 삶의 기쁨이며 치유와 회복의 교제로 본 것이다. 예수와 함께하는 식탁은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 식탁이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서로 음식을 나누는 애찬은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식탁과 다른 차원을 갖는다.

교회가 2천 년 동안 지켜온 성찬례는 예수의 살과 피의 상징이며, 기쁨과 즐거움이 풍성하고 존재의 기쁨으로 충만한 만찬의 축약형이다. 또한 희생과 헌신, 봉사를 통해 우리의 살과 피를 형제들과 함께 나누는 거룩한 의례다. 기쁘고 즐겁게 나누어 먹는 일이 곧 복음이며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이벤트다. 그렇다, 복음은 이벤트다.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가 복음이다.

즐겁게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의 뜻이다. 기쁘지 아니한가, 이 복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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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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