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도 우리입니다-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속헹을 다시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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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우리입니다-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속헹을 다시 기억하며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9.20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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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서 마주친 풍경

몇 년 전에 전북 익산 시대산 기슭의 원불교 공원묘지인 ‘영묘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한참 비가 내리던 날이었는데, 인상 깊은 장면은 평분(平墳)이었습니다. 원불교는 교무들이 죽으면 화장하고, 다른 신자들이 매장을 원하면 봉분을 세우지 않고 평평한 땅에 유해를 묻어 바닥에 누운 비석만으로 고인의 위치를 알려 줍니다.

이런 평장(平葬)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서도 보았고,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 묘지에서도 같은 관행이 늘어납니다. 큰누이가 묻힌 충남 서산의 교회 묘지도 평장이었습니다. 납골당에 모시지 않는다면, 대신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평장을 늘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불교에서는 ‘일원가족’(一圓家族)이라는 교리 차원에서 평장을 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가릴 것 없이 평등한 한 가족이라는 것이지요.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다투고 시기하고 경쟁하더라도, 죽어서는 모두가 본디 하나였음을 알아차리라는 것이겠지요.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모두 하느님에게서 나온 한 자매형제, 평등한 동무임을 기억하자는 뜻일 테고요. 그런데 살아서 차별받고, 죽어서도 몸을 제대로 가눌 길 없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경기도 군포에 있는 캄보디아 불교 센터에서 일하는 린사로 스님에 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다 죽고, 장파열로 죽고…. ‘장례 전담’ 스님이 전한 이주노동자의 죽음”이라는 오마이뉴스(2022년 7월 23일 자) 기사입니다.

 

사진출처=노컷뉴스
사진출처=노컷뉴스

캄보디아에서 온 사람들

린사로 스님은 2006년 스물여섯 살에 캄보디아에서 유학을 왔습니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와 국어국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사회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답니다. 공부만 하는 학승은 아닙니다. 주말마다 군포 법당에 마련된 불교 센터에서 캄보디아 노동자들을 만나고, 그들 가운데 한국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저승길을 몇 년째 정성껏 배웅해 온 분입니다. 

2021년 12월 8일에 찬드라가 7개월 동안 홀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을 때 나이는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대장에 작은 염증이 생겼지만 오랜 시간 방치하다 결국 대장이 터지고, 이미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합니다. 이를 두고 린사로 스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병들어 사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공장이나 농장 등에 있는 방에서 자다가 죽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아파도 참고 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병원 가는 방법도) 모르고. 직접 갈 수도 없고. (사용자에게) 부탁해도 다 바쁘니까…. 병원에 가도 주로 주말에 가는데, 진료를 볼 의사 선생님이 (평일만큼) 다양하게 있는 것도 아니고요.”

고용 허가를 받고 한국에 입국한 이주노동자 가운데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는 근로 허가(E-9) 비자를 받은 16개 나라 가운데 가장 많습니다.  2020년 겨울 경기도 포천의 어느 농장 비닐하우스에서 잠을 자다 사망한 여성 이주노동자 속헹의 이야기는 참담합니다. 포천에 한파 특보가 내려지고 영하 20도에 이르는 맹추위가 닥쳤지만, 숙소에는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난방이 가동되지 않았습니다. 사시사철 따뜻한 나라에서 살던 속헹이 감당할 만한 추위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 밤에 그녀는 얼마나 외롭고 삶이 아득했을까 떠올려 봅니다. 속헹의 죽음을 두고 당시 고용노동부는 “개인 질병에 의한 사망”이라며 중대재해 조사에 나서지 않았고, 사업주에게는 고작 과태료 30만 원이 부과되었다고 합니다.

시급이 올라도 삶은 나아지지 않고

2016년 3월에 입국한 속헹이 처음 일한 곳은 경기도 남양주의 한 농장이었는데, 당시 시급은 최저임금인 6,030원이었습니다. 근로계약서엔 휴게 시간이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근로기준법 63조는 농어촌 노동자에겐 근로 시간과 휴식·휴일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법대로 하면 농어촌 노동자는 고용주가 한 달 내내 휴일을 주지 않아도 되고,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을 시켜도 항의할 수가 없습니다. 농장주는 숙박 시설 제공료도 떼었습니다.
2018년 2월에 경기도 포천에 있는 농장으로 일터를 옮겼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시급은 7,530원으로 오르고 숙박비가 조금 줄었지만, 남양주 농장에서 받지 않던 중식비로 농장주는 월급에서 9만 원을 떼었습니다. 숙박비까지 내야 했던 숙소는 비닐하우스를 날림으로 개조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2019년 7월에 정부가 모든 외국인의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면서 속헹 또한 지역 건강보험에 가입했지만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병원 문턱을 밟아 본 적이 없습니다. 속헹이 낸 건강보험료는 월 11-13만 원이었는데, 비슷한 임금을 받는 한국인 노동자의 2-3배나 되는 금액입니다. 정부가 이주노동자에게 건강보험 전체 가입자의 평균 보험료를 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속헹은 1년 반 동안 200만 원이 넘는 보험료를 납부하고도 건강검진조차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농장주가 말을 안 해도, 주중에 병원 갈 엄두를 내기는 당연히 어려웠을 겁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하다

속헹이 이승에서 삶을 마감한 2020년 12월 20일 포천 비닐하우스 숙소 서랍장에서 2021년 1월 10일 자 프놈펜행 항공권이 발견되었습니다. 캄보디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날을 고작 20일 앞두고 절명한 속헹을 위해 린사로 스님은 그녀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힘든 사람에겐 힘듦이 사라지고, 아픈 사람에겐 아픔을 없애고, 고통받는 사람에겐 고통이 사라지기를.” 린사로 스님은 속헹의 49재에서 “이주노동자들을 값싼 노동력으로만 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이곳에 와 있는 까닭은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입니다. 

요한 23세 교황은 한때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교수직에서 밀려나 발칸반도에서 오랫동안 외교관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1925년에는 신자가 6만 명에 불과한 불가리아의 소피아 감목대리로 임명받았습니다. 덜거덕거리는 노새 마차를 타고 불가리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신자들을 만나는 게 일이었는데, 도중에 산적도 만나고 군 순찰대에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10년 만에 그리스와 튀르키예 주재 교황사절로 임명되었을 때, 불가리아 신자들에게 행한 고별 강론이 인상적입니다. 

아일랜드에선 성탄절이면 창가에 촛불을 켜 두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방을 찾아 헤매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머물 곳이 있다고 알려 주는 신호였다면서, 론칼리 대주교(요한 23세 교황)는 약속합니다. “어디서든 불가리아 사람이 제집 앞을 지나가면 길눈이 어두운 분이라도 창문에 켜진 촛불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문을 두드리세요! 가톨릭 신자인지 아닌지 물어보지 않을 겁니다. 불가리아에서 오신 형제이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의 형제인 제가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친구인 제가 기쁜 마음으로 그날을 축제의 날로 지낼 것입니다.” 

이참에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또는 객지에서 제 삶의 천막을 치려는 모든 순례자(이주민)를 위해, 우리 집 창문에 그들을 위한 촛불을 밝혀 둘 의향이 있는지 스스로 되묻는 하루입니다. 그들도 우리입니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9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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