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 아줌마의 일기, 그냥 지금처럼 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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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아줌마의 일기, 그냥 지금처럼 쓰시라
  • 장진희
  • 승인 2022.09.20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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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살려낸 것들 6 - 무주에서: 순이 아줌마 일기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순하고 선하게 살아라.'
하늘을 거스르지 말고 땅을 해치지 말라는 조상들의 지혜, 지상에 살면서 지향했던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가마솥에서 퍼낸 뜨거운 물 한 방울도 마당에건 수채에건 함부로 버리지 않았던 우리 할머니들, 풀뿌리 하나와도 지렁이 한 마리와도 그렇게 서로 존중하며 살았습니다. 살아갈수록 아프게 그리운 모습입니다.

요새는, 특히 도시에서는 순하고 선하게 살았다가는 당하기 십상이어서 그 가치는 이미 빛을 잃고 오히려 단단히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한결같이 똑똑하고 머리 좋고 말 잘하고 기세등등하고 사나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세상이 순하고 선할 리 없습니다. 좋은 세상일 리 없습니다.

순이 아줌마 이름에 들어 있는 '순할 순(順)'자, 순이 아줌마는 그 바람대로, 늘 하늘의 뜻을 묻고 땅을 살피며 사는 사람입니다.

순이 아줌마네는 집에서 벌을 키웁니다. 많이도 아니고 딱 한 집 먹을 꿀을 낼 정도로만 키웁니다. 그런데 이 한봉은 양봉이 가장 무섭습니다. 양봉 하는 사람들이 근처에 있으면 양봉 벌이 한봉 벌을 다 물어 죽여 버리기 때문입니다.

순이 아줌마는 이 벌이 하늘의 뜻을 알리는 영물이라고 합니다.

"아, 이상하지? 동네 초상이 날라고 하믄 벌이 벌써 알아. 벌이 머리에 하얀 띠가 둘러져 있으면 영락없이 다음날 초상이 난당께."

순이 아줌마는 그런 날이면 얼른 집안 일을 갈무리 해놓고 동네 초상 치를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글고, 진짜로 희한한 건, 동네서 누가 분봉을 해달라고 해서 해주잖어? 근데 동네서 인심을 잃은 집이거나 우리 집하고 사이가 안 좋은 집에서 분봉을 해가믄 절대로 그 집에서는 벌이 안되드라고. 다 나가불등가 도로 우리 집으로 와부러."

순이 아줌마는 미물의 움직임을 통해서 하늘의 뜻을 알아차립니다.

친하게 지내던 동네 아저씨가 돌아가셔서 우리가 막걸리 한 병을 들고 산소에 가던 날 순이 아줌마는 그 집 아줌마랑 산소 둘레에서 풀을 매주고 있었습니다. 절을 하고 고개를 드니 옆으로 다가온 순이 아줌마.

"아! 와줘서 고맙디야. 이거 봐. 아직 거미가 나올 때가 아닌데도 이 거미 기어다니는 것 좀 봐. 세상에... 두 마리네. 자네들 복 받것네. 죽은 사람이 이라고 응감을 해주니......"

순이 아줌마에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따로가 아닙니다. 육신이 썩어 없어질 뿐이지 영혼은 같이 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지상의 생명들을 통해 그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순하고 선하게 사는 순이 아줌마... 도시로 나간 아들들이 늘 걱정입니다. 가난한 산골 살림에 변변히 가르치지는 못했지만 착하기 짝이 없는 아들들이 나이가 들어도 장가를 못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들은 힘겨운 도시 생활 중에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집에 와서 이런저런 농사 일을 돕습니다. 다리가 아픈 아버지 대신 경운기를 몰고 밭을 갈고, 비닐을 씌우고 고추를 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요새 여자들 눈이 삐었지. 뭐이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 되었어. 저런 사내와 결혼을 마다하다니.'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는 순이 아줌마가 공책과 연필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얼굴이 붉어지며
"나 이것 좀 봐줘어"
하시는데, 공책에 빼곡히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일기입니다.

"아, 울 아들이 나한테 이런 걸 쓰라네. 엄마 같은 사람이 일기를 써야 한다고, 지가 알아서 인터넷인가 뭔가 하는데 보낸다고 나한테는 그냥 되는 대로 쓰기만 하라는 것이여. 근디 아무래도 뭐이가 맞는지 어짠지 알 수가 있어야제."

띄어쓰기가 문제고, 맞춤법이 문제겠습니까? 입에서 발음되는 대로 적어놓은 그 일기에는 그야말로 당신의 삶과 생활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대보름 무렵 어느 날의 일기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설, 추석 명절 못지 않게 어김없이 쇠던 영등제 얘기가 적혀 있습니다. 정월 초하루부터 정재에 지푸라기로 만든 영등할매를 모셔 두고 스무하룻날 영등할매가 올라가기까지 하늘의 뜻을 살피던 얘기입니다.

이 영등제 동안, 영등할매가 딸을 데리고 오면, 바람이 불고 그해 농사는 흉년이 든답니다. 또 며느리를 데리고 오면 비가 오고 그해 농사는 풍년이랍니다. 집안 식구 누군가 아프면 절대로 그냥은 안 낫고, 보리 이파리를 뜯어다가 영등할매에게 잘 빌어야 낫는답니다. 그때는 이 영등할매가 가장 무서웠기 때문에 그렇게 잘 모시다 잘 보내드리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답니다.

아! 이 분들 돌아가시면 그 심성, 그 지혜, 그 사람살이...... 이제 누가 알고 지켜갈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순이 아줌마의 아들이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엄마의 삶을 간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 엄마의 그 아들입니다.

순이 아줌마가 글 쓰는 데 절대로 주눅 들지 않도록 응원을 단단히 해주었습니다. 띄어쓰기, 맞춤법 다 괜찮다고, 그냥 지금처럼 그대로 쓰시라고...... 당신이 쓰면서 헷갈려 하는 몇 가지만 조심스레 알려 드렸습니다.

순이 아줌마의 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정치 얘기, 사기꾼들 얘기가 뉴스 첫머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이 아줌마가 본 세상 얘기가 제일 먼저 나오는 그런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무주에서 진도, 지금은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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