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입시다, 그리고 죽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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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입시다, 그리고 죽읍시다
  • 김회인 신부
  • 승인 2016.08.1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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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 광화문 시국기도회 강론: 김회인 신부

오늘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환시 중에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꿀처럼 달콤하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아먹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달콤할 리 없는 세상에 대한 비탄과 탄식, 그리고 한숨이었습니다. 그러고는 하느님은 예언자에게 “반항의 집안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들을 알려 주어라” 명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할 의무가 있는 예언자

김회인 신부_ 전주교구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말씀을 전할 의무가 있고, 살아갈 권리 또한 있는 만큼 에제키엘 예언자는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실제 유배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게 사회 제도화 되어있던 당시대에 하느님 보시기에 ‘역겨운 짓’이 어떻게 해서 벌어진 것일까?

당대 위정자, 사제, 율법학자를 비롯한 사회지도층들은 바빌론 통치라는 현실에 안주하는 한편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이익을 챙기기 위해 패거리, 곧 폐쇄적 집단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패거리 안에서 형성한 문화(우상 숭배 등)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강요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진노를 산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데칼코마니 마냥 이 시대 이 땅에서 이스라엘의 모습을 봅니다.

바빌론 제국은 미 제국주의로, 당시대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시대의 정치인, 법조인, 경제인을 비롯한 소위 사회 엘리트층이라 여겨지는 이들로 치환됩니다. 당장 바빌론 통치 아래에서 자신들의 안위를 바라던 율법학자들이나 사제들의 모습은 사드 한반도 배치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에서 살피게 됩니다.

미 제국의 국익을 위한 사드 배치

이 나라 위정자들은 누가 보아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반도 배치가 오로지 미제국의 국익을 위한 것임이 분명함에도, 미 군부의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마치 자국의 군대에서 정한 것인 양 이를 수용하여 일사천리로 배치과정을 진행하였고, 국민의 생존권을 내팽개쳤습니다.

그리고는 성주에 거주하지 않는 이들이 사드 반대를 외치기만 하면, 나라의 질서를 혼란케 하는 외부세력 운운하며 배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드 배치 문제를 단일 지역 내 문제로 축소, 왜곡시켜버렸습니다.

이렇듯 정부는 이 나라가 미 제국의 식민지임을 만 천하에 선포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바빌론의 유배 생활을 자처한 꼴입니다.

다음으로 당시대 자기들의 우상과 혐오스러운 것들을 섬김으로 자신들을 부정하게 하고 온갖 죄악에 빠져들게 되었던 모습은 이 시대의 우상인 돈, 곧 자본에 인격을 부여한 현상으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인격을 부여받은 재화가 사람 살리는 선한 방식으로 스스로 작용할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근래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재화가 그리 작동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한 정부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바로는 이러한 믿음이 단지 신화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습니다.

나아가 시장 내 재화가 자신들을 부정하게 하고 온갖 죄악을 양산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패거리 내 시장주의자들은 물신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의 죄 성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신으로 말미암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죽어가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대체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 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러한 처사에, 왜? 라는 물음을 던져보건만 결단코 시민의 이익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기에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정황상 현 정부가 국익이라 말하고, ‘국민이 바라는’이라 말할 때의 국가와 국민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보통명사로의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답을 찾게 됩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와 국민이, 자신들의 삶을 지탱하고 정통성을 담보하는 패거리 내 통용되는 단어로 축소하여 이해한다면 말입니다.

이들 무리는 일제 강점기 이전으로부터 이 나라의 정통성을 물려받았다 자부하는 한편, 왕국을 형성하고서 오래전부터 높은 담장을 쳐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담장 내부에서 그들이 말하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진화를 이제껏 이뤄왔습니다. 일제 때 형성된 친일파 천민자본가들의 패거리 문화가 해방 후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현재의 이 나라 엘리트층을 형성했음은 익히 알려진 바입니다.

저는 이들의 폐쇄성은 우리나라에 유독 심한 아파트단지 문화에서 살피게 됩니다.

사진=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아파트 문화의 폐쇄성, 계층 사이의 폐쇄성

얼마 전 <하이라이즈>(제임스 발라드, 문학수첩, 2012)라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해당 책은 1975년 당시 미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폐쇄성을 간직한 계층 간의 갈등이 어떠한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이러한 사회가 어떻게 붕괴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는 당시 선진국이라는 미국보다 10년이나 앞서서, 게다가 소설이 아닌 현실로서 아파트 단지의 폐쇄성을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빌미로 사회에 실험하였고, 지금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고급 아파트 단지 내 택배차량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일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또한 얼마 전 고급 아파트 단지 내 경비로 일하던 노인을 두고 종이라 말하고 심한 구타를 하였던 사건을 비롯하여 고급 아파트 단지 집값을 이유로 법적으로 지을 수밖에 없는 임대아파트의 통행권을 박탈하고 철조망으로 고립시키는가 하면, 놀이터 공원 등의 사용을 규제하는 일들, 잘 산다는 서울의 동네에서 간혹 볼 수 있습니다.

이들 패거리들은 이렇듯 자신만의 단지를 형성화한 것을 넘어서 특권층의 권력과 재화를 세습할 수 있는 여러 제도들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고 만들어 왔습니다. 얼마 전 역사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했던 일을 이와 연관하여 살필 수 있을 듯합니다.

그 결과 학력의 세습 뿐 아니라, 직업군마저 세습화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만들어낸 제도를 강요했습니다.

곧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의 세상이며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투쟁-경쟁은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경쟁에서 도태되는 이들에게 낙오자의 낙인을 부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구조를 다수의 시민들에게 강요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사람답게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그러나 선택이 아닌 강요였던 경쟁을 이 나라 사회 구성원이면 누구라도 하고만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경쟁’은, 놀이 등에서 찾아지는 경쟁과는 다릅니다. 적자생존, 혹은 약육강식의 구도를 아이들에게 사회화시키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한 폭력성을 내포하는 경쟁입니다. 곧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올라서야 한다는 신념이 사회화됨으로써 사회성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은 외면되고 맙니다.

이러한 이들이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특정역할을 하게 될 때 비로소 ‘파괴적 평범성’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됩니다. ‘폭력의 일상화’라고 해야 할 까요. 이렇듯 지난 과거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이 나라 현실에서 ‘파괴적 평범성’은 오랜 역사를 통해 교육되어 사회화된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현재진행형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요즘 들어 특히 도드라지는 비윤리적인 사건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의 근원을 개개인의 성향, 또는 특정 계층의 문제점이 아닌 패거리를 형성한 이들의 왜곡된 문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폐쇄적 집단 공동체 구성원들은 노인네건, 젊은이건 같은 사고를 공유할 뿐 아니라,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을 정당화 하려는 진화를 이뤄왔고, 자신들이 형성하고 만들어낸 문화를 시민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사회를 조장하였습니다.

사진=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이젠 개~ 돼지~ 는 욕도 아닙니다

그러니 얼마 전 99%의 개, 돼지 발언은 특정인이 순간 잘못 내 뱉은 말이 아닌, 이들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사실 개, 돼지라는 말은 보통명사이기에 우리가 일반적인 상황에서 쓰게 되는 개, 돼지의 표현이 아닌 개 같은 특성, 돼지 같은 특성을 지닌 그것을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분들 모두 개의 특징, 혹은 돼지의 특징을 가진 이가 됩니다. 이젠 개~ 돼지~ 는 욕도 아닙니다. 그냥 호칭인 것이지요. 뭐, 개, 돼지 등은 생명이라도 있으니 다행입니다만 모 지사는 자신과 뜻이 다른 이들을 두고 쓰레기라 하였지요.

이렇듯 패거리들은 약자를 탈인간화 시킴으로써 사회적 약자를 인간의 도덕적 영역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껴왔으며,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약자를 죽이는 것이 옳다는 확신으로의 도덕성 전치 현상까지 발생하지요.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이들은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도덕, 믿음을 강화하고 모든 갈등의 책임을 적에게 돌리는 집단적 신념을 형성합니다. 결국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은 패거리들에겐 적일 따름입니다.

(그러니 얼마 전 민중총궐기 중 발생한 물대포 사건은 그들 편에선 지극히 당연합니다. 패거리 밖의 존재는 존중받고,인권을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닌 사회질서를 훼손하는 존재로서 인식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물대포가 되었든, 몽둥이가 되었든, 죽을 만큼 때려서 길들여야 한다는 행위는 이 사회 곳곳에서 발생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 이 세상 위정자들의 폭거를 보고 분노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예레미아 예언자와 같은 의로운 이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이 예언자 

감히 희생자들을 두고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습니다만, 멀게는 4.3 사태의 희생자들,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 이 모두가 “반항의 집안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들을 알려 주기” 위해 예언자로서 세상에 파견된 이들입니다.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 또한 그러합니다.

임마누엘 형제가 받는 고통 그 자체로 부당한 국가 폭력을 행하는 이들, 하느님 창조물-생명을 북돋고 살리는 이 땅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드는 족속들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자신의 온 삶을 통해 이를 드러내왔습니다.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 역시 그러합니다.

이들은 우리 사는 사회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죽음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자본의 주인 노릇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이 결국 자본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입니다. 결국 이 사회, 자본이 사람살이를 풍요롭게 하는 도구가 아닌 사람을 죽이는 주인이 되어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물론 이들 뿐이겠습니까? 얼마 전까지는 높은 성벽 뒤편에서 뒷짐 지고 귀를 닫아버린 패거리들이 볼 수 있도록, 그리고 들을 수 있도록 사람 살수 없다는 높은 곳으로 올라 죽을 만큼 간절한 소리를 외쳐대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용산 참사 희생자들이 그러하였고,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칼날선 외침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길거리 여기저기에는 노동깃발들이 날리고 있으며, 노숙을 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들은 한결 같이 ‘사람답게 살게 해 달라.’고 세상에 고합니다.

이러한 모든 이들이 이 시대의 예언자입니다. 예제키엘 예언자가 하느님 말씀을 받고서 이를 전할 수밖에 없는 삶, 유배의 삶을 살아간 것처럼 이들 역시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느님은 사람의 아들을 보내어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고 단언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우셨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 죽음의 문화를 부정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세상의 박해를 받을 것이며 계속 죽어갈 것입니다. 이러한 의인의 죽음은 세상의 타락을 고하는 일이 되고 이로 말미암아 타락한 저들의 문화는 일순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이것이 우리의 신념이기에 결단코 죽음의 문화에 타협하는 일 없이 이 시대의 선각자,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가슴에 담음으로써 우리 각자 또한 이 시대의 예언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 죽을 만큼 고통스러울 것이고 사회 구조에서 배제되어 소외당하는, 곧 유배의 삶을 살지 모릅니다. 심지어 죽음에 이를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결국 말씀을 달게 받아 먹은 이들이 예언자로서 살아가야 할 의무이며 권리입니다.

죽입시다...그리고 죽읍시다

정말 죄송하게도 이곳에 계신 분들 저를 포함해서 모든 분들에게 감히 청합니다.

죽입시다. 죽임에는 참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이 시대 사회 구조와 구성원 간의 관계성 상실을 죽음으로 간주합니다. 성벽 너머 패거리 문화에 빠져 있는 이들이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세습하지 못하도록 의로운 이들의 세상과 이들을 고립시켜 나갑시다. 이에는 선거 혁명도 있을 수 있을 것이며, 패거리들이 만들어 낸 문화가 무가치함을 만 천하에 고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들의 허언이 결국 힘을 발휘 하지 못하게 될 때, 지난 군부의 인물이 현 정권을 마지막으로 권력에서 사라질 것이고, 이들의 후손이 미래의 권력 안으로 편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읍시다. 지금껏 살아왔던 죽음의 문화와 타협하였던 바가 있으면 과감하게 단절함으로써 세상이 주는 박해를 기꺼이 받는 예언자가 되자는 겁니다. 그리고 단절로 인한 자유로움으로 자유와 정의, 진리를 위하여 투신합시다.

이러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분명 해방의 날이 올 것입니다.

“해방의 날은 의인들의 구원과 원수들의 파멸이 이뤄지는 때입니다.”

이날에 사람의 아들, 무수히 죽어갔고 고통 받고 있는 이 시대의 예언자-예수들은 분명코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입니다.
아멘.
 

김회인  신부_ 전주교구 국내수학

<출처/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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