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남, 그 목사의 카리스마는 폭력이야
상태바
수리남, 그 목사의 카리스마는 폭력이야
  • 최태선
  • 승인 2022.09.19 23: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태선 칼럼

영화 <수리남>을 보았다. 줄거리는 뻔하다. 그곳에서 마약 왕은 목사다. 이것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 마약왕국을 세우려는 주인공에게 공동체는 필수적이었고, 그 가장 좋은 방법은 교회 공동체였다. 더구나 교회의 성찬에서 교인들에게 마약을 탄 음료수를 마시게 한다. 아무래도 나는 이제 사탄의 새끼가 된 것 같다. 이젠 그런 것을 보아도 조금도 이상하지가 않다. 마약 왕 목사가 교인들을 성노리개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신선하다.

왜 그럴까. 그 모든 것들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권력이 되었다. 누구라도 목사에게 대들다가는 그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 목사는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교회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만큼 목사의 권력은 공고하다. 따라서 절대적인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목사직을 차용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나는 지금도 내가 신학대학원 시절 다니던 교회의 목사가 나를 부르던 호칭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목사는 나를 부를 때 꼭 “전도사님”이라고 불러주었다. 왜 ‘님’자를 붙이는가. 마약 왕 목사가 친절하게 존댓말을 하다가 어느 순간 말투가 바뀌는 것과 다르지 않다. 존댓말은 목사가 내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는 여유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실제로 이후의 그 목사의 행태는 그랬다. 목사에게 밉보이면 목사안수는 불가능해진다. 나는 여러 목사들에게서 그런 위협을 느꼈다.

그렇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집단이지만 목회자 사회는 조폭과 같다. 담임목사가 실제로 따귀도 때리고 군대처럼 쪼인터를 까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한 것은 영적인 권위를 폭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전광훈이 생각난다. 전광훈을 볼 때마다 그는 목사라기보다는 깡패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사실은 부흥회 전문 목사들의 전형이다. 이들은 까만 양복에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항상 시대 최고의 고급차를 타고 다닌다. 이들의 말투는 영락없는 깡패다. 신대원 시절 부흥회 전문 목사들이 신학생들을 고르려고 온 적이 있다. 나는 그때 그 목사들을 대표해 말했던 목사의 말투와 한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야, 니들 중에 목회도 하고 돈도 벌고 싶은 놈들은 나와.”

실제로 그들을 따라 나선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사들에게 깡패처럼 복종하다 독립을 한 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A급, B급, C급으로 분류되는 부흥회 전문 목사가 되면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합법적인 깡패들이 된다.

신사도 운동을 하는 이들 역시 이들과 비슷하다. 예언이나 능력을 행하면서 이들은 깡패처럼 군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카리스마라고 한다. 그것은 카리스마가 아니라 폭력이다. 카리스마는 결코 폭력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폭력을 카리스마라고 부르며, 자기들의 목사가 카리스마가 있다고 좋아하고 자랑질을 하고 다닌다.

내가 신대원 시절 다니던 교회의 목사는 신대원에서 실천신학을 강의하던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이 실천신학 교수가 되는가. 목회를 잘 하는 목사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조폭 두목 같은 그 목사가 실천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전라도 출신의 전도사들이 그에게 몰려왔던 것도 나는 기억에 남는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조폭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 목사처럼 신대원에서도 인정받는 목사가 실제로 조폭 같았기 때문이다.

어떤가. 내가 정말 사탄의 새끼 같지 않은가.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내가 나도 싫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평화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평화주의자는 폭력을 거부한다. 하느님 나라 운동은 무저항주의가 아니라 비폭력저항주의이다. 평화주의자는 비폭력으로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교 안에 폭력이 자리하게 된 것은 단순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복음의 사망이며 하느님 나라의 실종이다. 이것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수리남>을 보라. 어쩌면 <수리남>은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엑스레이로 찍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한 M.R.I. 촬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도전승>은 교리문답 교사들에게 모든 잠재적 세례 지원자들의 직업적 행위들을 살피고 그들에게 자색 옷 입기를 중단하고 칼 휘두르는 일을 포기하게 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 요구야말로 그리스도교를 지키는 보루였다고 생각한다. 자색 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들이 누리는 모든 특권과 사치와 허영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더욱 중요하다. 당시의 칼 휘두르는 일은 폭력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누구나 폭력을 단념해야 했다. 이 두 가지는 복음의 요체임과 동시에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의 구성을 위한 전제요, 선결 요건이었다.

이것이 무너졌을 때 하느님 나라의 평화는 폭력으로 대치되었다. 선교사들이 식민지 정복의 선봉에 섰던 것도 오늘날 군대에 군종이 있는 것도 그리스도교 안에 폭력이 자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개신교를 통해 그 폭력은 조금 더 적나라해지고 노골적이 되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느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이 말씀을 대우명제로 살펴보자. 나는 이 방법을 묵상의 한 방법으로 늘 사용한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이렇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자기의 자녀들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은 평화를 이루려 하지 않는 복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 다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생각해보자.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평화를 이루고 있는가. 반대로 폭력을 향해 치닫고 있는가. 왜 마약 왕을 묘사하는데 하필 그 사람이 목사가 되어야 하는가. 목사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비슷한 현상들을 오늘날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서 폭력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힘과 영향력이 판을 치고, 능력주의 사회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상징하는 것이 바로 폭력이다.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 폭력의 종교가 되었다. 모든 권력(권위)은 폭력이다. 하느님 나라는 권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이다.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이다.

그것이 가능하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드는 이유가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상상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입버릇처럼 떠드는 Kingdom builder가 되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식민지 정복을 선교로 이해하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는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