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운 곳에서 너의 눈물을 보았다-봉정사 극락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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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운 곳에서 너의 눈물을 보았다-봉정사 극락전에서
  • 유대칠
  • 승인 2022.09.19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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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칼럼
사진=유대칠
사진=유대칠

안동의 봉정사는 참 고운 사찰이다. 화려한 색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고운 사찰이다. 크고 웅장한 석조물 없이도 부족함 없이 충분히 고운 그런 사찰이다. 그런 봉정사의 극락전은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가장 오랜 목조 건축물이다. 부석사의 무량수전보다 더 오랜 목조 건축물이다. 그리고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봉정사의 극락전 역시 배흘림기둥을 가진다. 그리고 둘 다 아미타불의 공간이다.

아미타불의 또 다른 이름이 ‘무량수불’이고, 그가 설법하고 있는 곳이 바로 ‘극락’이다. 그러니 무량수전과 극락전은 모두 아미타불의 공간이 된다. 그러니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봉정사 극락전에서도 우린 아미타불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봉정사의 아미타불 뒤로 우린 후불탱화 하나를 볼 수 있다. 그 후불탱화 속엔 본존불(本尊佛)인 아미타불만이 홀로 있지 않다. 양쪽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함께 더불어 있다.

관세음보살, 봉정사 극락전에 가기 전 나는 그의 가르침이 담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중생을 구원하는 자비(慈悲)의 아미타불을 돕는 관세음보살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가진 보살이다. 그러니 ‘천수천안(千手千眼)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손마다 하나의 눈을 가진 그런 손을 천 개나 가진 까닭이 무엇일까? 『반야심경』을 읽으며 그 답을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관세음보살이 전하는 지혜 가운데 유명한 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그것이면 남보다 더 행복하겠다고 욕심낼 만한 것도 사실 비어 있는 것일 뿐이다.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두고 우린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 욕심을 내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우리가 욕심내는 그 모든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란 것과 그것을 욕심내는 우리 자신도 사실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깨우쳤다. 그렇게 자기 자신도 비어 있는 아무것도 아니란 걸 깨우치자 아집(我執)의 밖에 나 아닌 이의 눈물이 보였다. 아픔이 보았다. 관세음보살은 그들과 더불어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처럼 두 손과 두 눈으론 부족했다. 더 많은 이의 아픔을 보아야 했고 다가가 더불어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관세음보살의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소리를 본다는 말이다. 세상의 온갖 아픔을 본단 말이다. 다가와 더불어 있으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지혜를 전한다. 아집을 비우면 그 아집 밖 더불어 살아야 할 이가 보이고, 그와 더불어 저마다의 욕심을 살지 않으면, 바로 그곳이 ‘극락’이다. 이제 알겠다. 자비의 화신 아미타불의 극락은 관세음보살의 극락이어야 한다. 그러니 봉정사 극락전에도 부석사 무량수전에도 관세음보살이 빠질 수 없다.

 

사진=유대칠
사진=유대칠

얼마 전 폭우에 목숨을 잃은 반지하의 가족을 우린 왜 보지 못했을까. 또 보육원을 나와 이 사회에 첫발을 시작하는 이의 연이은 자살을 우린 왜 막지 못했을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이 많은 이주 노동자의 목숨이 사라지고 있다. 2017년에서 2021년 동안 태국 이주 노동자만 535명이 목숨을 잃었다니 매해 1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거다.

2020년 12월 20일, 영하 18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비닐하우스만이 허락된 캄보디아인 이주 노동자가 추위에 얼어 목숨을 잃었다. 2022년 2월 23일, 미숫가루 공장에서 일하던 한 인도인 이주 노동자가 불에 타 목숨을 잃었다. 2022년 8월 9일, 안전시설 없는 컨테이너에 생활하던 중국인 이주 노동자가 차오르는 물에 목숨을 잃었다. 여전히 자신의 일터에서 목숨을 잃어가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도대체 왜 우린 이들의 이 외로운 죽음을 막지 못했을까? 어쩌면 우리의 욕심, 우리의 아집으로 그들의 그 외로운 눈물과 아픔을 보지 못한 건 아닐까? 남보다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그 욕심에 그들의 그 외로운 홀로 있음에 더불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나만을 위해 살아서, 오직 아집 속에서만 살아서 그런 것은 아닌가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 독한 아집을 버린다면, 관세음보살의 눈과 손이 그러했듯이, 그들의 아픔에 다가가 더불어 있었을 거다. 그러면 반지하 그 외로운 곳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을지 모른다. 보육원 출신의 힘겨움으로 목숨을 버리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이 땅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주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렇게 외롭게 목숨을 잃어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미타불을 따라 자비의 삶을 살아간다면, 관세음보살을 따라 나 아닌 이의 아픔과 더불어 있다면, 바로 그 삶의 자리가 극락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자리가 바로 이 땅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다짐의 마음을 담아 다시 한번 되새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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