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가난을 유지하는데도 비용이 많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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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가난을 유지하는데도 비용이 많이 든다
  • 도로시 데이
  • 승인 2022.09.0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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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12-모욕을 당한 사람들과 상처받은 사람들

지난주에 나는 4번가에 있는 헌책방에 들러서 이리저리 책을 찾다가, 우연히 도스토예프스키의 <모욕을 당한 사람들과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아주 오래된 책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 책은 여러해 동안 읽지 못했던 것이었다. 책 값은 겨우 25센트였다. 나는 그것을 구입해서 바로 그날 저녁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그 책은 한 젊은 소설가의 이야기이며(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일 것이다), 그의 첫번째 책의 성공에 관한 이야기이며, 양부에게 큰 소리로 그것을 읽어주었던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그건 단순하고도 짧은 이야기이지만 네 가슴에서 우러난 것이구나. 네 주변에서 일어난 일은 갈수록 이해하고 기억하기 쉬워진다. 그리고 가장 억압받고 비천한 사람도 역시 사람이며, 너의 형제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고 말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게 바로 내가 글을쓰는 이유이지.”

 

그래서 지금부터 휄리치아의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날 오후 우리에게 여분의 옷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성 요셉의 집에 왔다. 자신에게는 외투가 그리고 아이들에겐 다른 옷들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수년 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 휄리치아는 22살이고, 키가 큰 푸에르토리코 계통의 여자이다. 만약 앞니 두 개가 빠지지 않았다면 그녀는 매우 예쁘게 보였을 것이다. 그녀의 남편 또한 22세였다. 그녀는 급하게 어른이 되어야 했는데, 14살 때 결혼도 하지 않고 첫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나이를 속였으며 병원에서 나왔을 때 친구들은 아기와 함께 있는 그녀를 받아들였다. 처음에 2년 동안 그녀는 아이를 키울수 있었으나, 직장을 잃은 후엔 그 아기를 남에게 맡겨야 했다. 결혼후 두 명의 아기가 더 생기고 나서야 그 애를 다시 데려올 수 있었다.

우리가 그녀를 만났을 때에 그녀는 많은 일들을 겪고 있었다. 두 번째 아이를 낳은 뒤 얼마되지 않아 그녀의 남편은 일하던 기계상점에서 손가락들을 잃었는데, 그 후에 어머니는 아들과 손자를 받아들였으나 휄리치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편의 어머니는 그 결혼을 결코 원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집은 이미 8식구로 가득 찼었다. 네 개의 방에서 8명이 지냈다.

휄리치아는 홀에서 잤다. 우리가 그녀를 알게 된 때가 바로 그 즈음이었다. 그녀는 다시 임신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잠시동안 피터 모린 농장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후 그녀의 남편의 건강이 나아졌고 다른 일자리를 얻게 되어 엘드리지가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얻게 되었다. 그 집은 끔찍하고 문제가 많은 집이었다. 벽에선 회반죽이 떨어져 내렸고, 홀에 있는 화장실은 늘 고장이었고 계단은 쥐와 고양이 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사는 아파트가 훨씬 낫다고 말한다. 제일 큰 아이는 이제 7살이다. 나머지 아이들은 한 살반과 두 살 반인데 둘다 걷는다. 집을 가진 휄리치아가 어떤 존엄성과 권위를 느끼게 해주는 것을 당신은 알 수 있다.

어느날 오후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했고, 결국은 저녁식사 때까지 머물렀다. 우리는 미트볼과 스파게티를 먹었는데, 그런 뒤 그녀는 아프게 되었고 집에까지 걸어갈수도 없을 정도로 아팠다. “음식이 나에게 맞지 않은 것 같아요,” 라고 그녀가 말하였다. “식사를 한 후에 매우 무겁게 느껴졌고 걸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당신의 남편이 오늘 오후내내 아이들을 돌보고 있잖아요? 집에 가는 것이 낳겠어요!” 라고 내가 다그쳤다.

그러나 내 예측과는 정반대로 7살난 아이가 다른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스와 전기도 다 끊어졌다,”고 누군가가 외쳤다. “집엔 기름 난로만이 있어요-열기라곤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는 기가 차서 옷 꾸러미를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그녀의 집까지 가져가도록 부탁하면서 함께 보냈다. 나는 그밖에 더 필요한 것이 있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음식이나 돈, 혹은 옷들을 더 달라고 말하지 않았으나, 방에서 소리가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원하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라디오가 환대의 집에 하나 더 생긴다면 갖고 싶다고 나에게 수줍게 말하였다.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너무나 많으니까요,”라고 그녀는 외쳤다. “나는 남편을 돕고 싶어요. 그는 배달부인데 일주일에 고작 35달러를 벌어요. 그래서 나도 일할 수 있기를 바래요. 그러나 아이들을 돌보아줄 탁아소가 없네요. 최소한 세 살이 되어야 받아줄 수 있겠지요. 토니는 괜찮아요. 그애는 학교에 가니까요.”

그 주간이 끝날 무렵 어떤 사람이 라디오를 주었고, 어느 쌀쌀한 일요일 아침에 우리는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녀와 아이들은 관리인의 방에서 따뜻하게 있었다. 관리인 여자는 휄리치아의 아이들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열두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들중 여덟명은 아직도 집에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녔으므로 6명의 아이들이 부엌과 거실을 뛰어다녀도 그리 북적거리진 않았다. 가끔씩 애들 중 하나가 마루나 침대에서 자곤 했으며(그곳엔 침대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그 주변에서 놀곤 했다. 그들은 너무 시끄럽지 않았는데, 아마도 많이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늘 그렇다. 항상 자리가 있다. 늘 또 한 사람을 위한 공간이 충분하다. 모두가 조금씩 덜 차지하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라디오를 갖고 그녀의 아파트로 올라갔을 때에 아래층에 있었다. 우리는 휄리치아네 집에 전기가 안 들어온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데,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한번 관리인 여자의 관대함을 보았다. 그녀의 남편은 그의 아파트에서 휄리치아의 부엌까지 전기줄을 연결시켰고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소켓으로 라디오를 연결할 수 있었으며 이어 소리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앉았는데, 조용하고 별로 가구가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 그녀는 갖고 있는 가구의 역사를 나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떻게 이집을 얻었냐 하면요, 그건 이런식이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하기 시작하였다. “당신도 아시죠, 사람들은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에게 세 놓기를 꺼려하죠. 그래서 우리는 살 곳을 찾기 위해 계속 돌아다녀야만 했어요. 우리집엔 이태리 사람들과 유태인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 사람으로는 우리가 처음으로 살고 있어요. 이 집은 모든게 수명이 다 되어 가죠. 당신도 보다시피 말이죠. 그리고 세비를 내는한 아무도 그 어떤 곳에도 신경쓰지 않아요.

우리는 한 달에 28달러를 세로 냅니다. 한 층에 방이 네 개 있고, 7층까지 있는데 걸어올라가야 합니다. 아이들과 3층에 사니 나는 운이 좋은 것이죠. 이 건물에 한 여자가 살았는데, 방이 2개 있는 엘드리지 가에 살고 있었을 때, 그 사람이 나에게 이 곳을 일러주었어요. 우리는 그때 절망적인 상태였어요. 수도는 얼어붙고, 화장실은 사용할 수 없었죠. 그래서 이사해야 했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마침 내 친구들이 이사를 나갔기 때문에 빈방이 있어요. 그곳에 내 가구를 들여놓았죠. 만일 당신이 가구를 사면, 그 아파트에 올수 있어요. 일주일에 23달러에요.”

내 남편이 주급 35달러를 받고 있었는데 이 집에 23달러를 지불해야 했어요. 글쎄, 우리는 이사해야 했고, 그게 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6월에 계약을 맺고 이사왔어요. 6월부터 12월 17일까지 우리는 일주일에 23달러씩을 그녀에게 지불합니다.”

휄리치아는 부엌 식탁 옆에 있는 의자에서 일어나(방에 있는 유일한 가구는 그 식탁과 의자 4개뿐이었다), 신문지와 폐품들로 가득한 상자 하나를 부엌 선반에서 꺼내왔다. 그녀는 그것들을 분류하기 시작하였다. “이것들은 성모상을 구입한 비용 관련 영수증들이예요, 13달러 34센트를 낼 때까지 매주 지불하고 그게 25주간 걸립니다. 챔버스가 아래에 있는 한 상점에서 샀어요. 여기에 셋돈 영수증들도 있어요.”

우리는 함께 영수증들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렇게 가난한 이들이 다른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있구나 하고 속으로 말했다. 가장 최근에 온 이민자들을 먼저온 이민자들이 착취하고 있구나!

“나는 12월에 아프게 되었어요.”, 휄리치아는 계속 말을 하였다. 그녀는 말할 때 기침을 하였다. “마누엘은 나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죠. 그래서 그는 급여를 하나도 못 받았어요. 그러자 이 여자가 그것을 바꾸었지요.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가구값으로 일주일에 10달러를 지불할수 있으며 셋돈은 집 주인이 왔을 때 내라고 말했어요.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지요. 그리고 여기에 그 영수증들이 있어요.” 그녀는 탁자 위에 있는 많은 종이 조각들을 펼쳤다. 그것들은 전부 7일 간격으로 적혀 있었고, 하나하나는 내가 방에서 본 보잘 것 없는 가구 셋트에 일주일마다 10달러를 지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앞방에는 다른 세입자가 그녀에게 주었던 옷장과 두 개의 육중한 의자 그리고 침대겸용 의자가 있었다. 그들이 고물상에서 구입했던 아기침대가 있었으며, 살 돈이 있을 때 얼음 한 조각을 넣어둘 구식 아이스박스가 있었고, 석탄과 석유를 섞어서 쓰는 난로가 있었다. 그러나 석유는 떨어졌으며, 석탄난로는 구멍이 가득 찼고, 뒤에 있는 굴뚝관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침실들을 들여다보지 않았는데, 침대들 이외에도 약간의 공간이 있었다. 침실들은 부엌 뒤쪽에 있었는데 통풍구로부터 약간의 공기와 빛이 들어왔다. 창문들은 다른 집 창문들과 마주보고 있으며, 4층 위에 있는 집들만이 겨우 하늘을 힐끗 보고 멀리 봄으로써 비가 오는지 해가 비치는지를 말할 수 있었다. 뒷방은 다른 세 개의 방과 분리될 수 있었으며, 따로 통하는 문이 있었고 또 화장실들이 홀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그 방을 세 놓을 수도 있었다. 내가 이스트가에 있는 뉴욕 콜에서 일했을 당시 살았던 맨하탄의 첫 번째 집이 그런 뒷방과 같은 방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따뜻했다. 또한 흰 침대보로 덮은 깃털침대가 있었고 항상 요리하는 좋은 냄새가 났었다. 이곳엔 요리할 불도 없었으며, 아랍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불은 두 번째 빵인 것이다.

나는 휄리치아와 부엌 식탁에 앉았으며, 앞에 있는 종이조각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7개월 동안 그녀는 매달 집세와 가구를 빌린 비용으로 92달러를 지불하였다. 그 후로 그녀는 그 탐욕스러운 과부에게 40달러, 집주인에겐 28달러를 합쳐서 68달러를 매달 지불했으니, 실로 관대한 할인이었다!

“그러나 이건 끔찍해요,” 하고 그 계산법에 언짢아하면서 나는 말하였다.

“우리가 이사 왔을 때 가구는 꽤 괜찮았어요,”라고 휄리치아는 그녀가 착취당하고 기만당해왔던 것을 해명하면서 설명하였다. “가구는 훌륭하게 보였어요. 엘드리지가에서 살아본 이후에 그 가구들이 얼마나 좋게 보였는지 당신은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글쎄,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수년간 이태리인들의 빈민가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나는 주부들이 어떻게 쓸고 닦는지 그리고 수지와 세제로 모든 것을 어떻게 빛나게 만드는지 알았다. 하지만 휄리치아는 비누를 살 돈도 그리고 세척제도 없었다. 그녀는 아마도 장소를 깨끗하게 하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이지 못했다. 생각해보건대 그녀는 아직 젊었고, 또한 경험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세를 계속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나요?” 나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서명했던 서류들을 생각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아마도 모든게 다 비교적 합법적이었을 것이다.

“이번 6월에 1년이 되는 겁니다.”

나는 숨이 막혔다. 천 달러 이상이 쓰레기 같은 가구에 지불되었고 다 지불할 때쯤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집 계약금 정도의 돈이 있으면 시골에 집을 살만했다.

우리가 영수증들을 살펴보는 동안, 가스와 전기 영수증이 떨어져 나왔다. 그것은 38달러 64센트짜리였다. 그것이 어떻게 지불되었을까? 나는 디트로이트 환대의 집 책임자인 루이머피가 말했던 그 말이 생각났다. “가난하게 되는 것도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요.”

한동안 함께 말하면서 나는 쓸모 없는 난로옆 벽 위에 걸려있는 한 물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것은 이음세가 찢어지지도 않고 손잡이가 떨어지지도 않는, 엄마들이 쇼핑할 때 무거운 잡화들을 견뎌내는 나이론 쇼핑백이었다. 아! 그 쇼핑백의 아이러니라니! 쇼핑갈 돈도 또한 요리할 스토브도 없는 것이다. 가엾은 휄리치아! 빈속에 미트볼과 스파게티를 먹은 후 그녀가 아팠던 것이 하나도 이상할게 없었다.

나는 집에 돌아갈 때 속으로 생각하였다. 걱정마 휄리치아! 봄이 왔으니 당신은 아파트에 난방을 할 필요도 없고 기름난로의 냄새를 맡으며 살지 않아도 된다. 곧 뜨거운 태양이 뉴욕거리들의 축축한 협곡으로 내려 쬘 거고, 공원 벤치들은 사람들로 붐빌 것이며 긴 겨울을 지낸 아이들은 밝은 햇빛과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되지요.

공원을 가로질러 걷고 있을 때, 나는 금초록색으로 변하며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무화과 나무들을 보았다.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없는 공공주택 주위의 덤불을 초록이 덮고 있다. 풀들조차 갈색 도시의 흙에서부터 밝아지고 나오기 시작한다. 지구가 다시 소생하고 나무들도 다시 살아난다. 아! 신비스러운 생명이여, 나무의 아름다움이여!

스테이튼 섬의 숲속엔(아직도 5센트면 나룻배를 탄다) 자작나무, 회색 열매가 달린 너도밤나무, 밝은 녹색의 소나무와 날이 흐려도 붉은색이 여전한 단풍나무들이 있다. 늪에는 초록빛 이끼가 있으며 봄 새들은 구슬픈 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초록과 적갈색의 무늬를 띤 눈부신 앉은부채들이 피터 모린 농장 기슭의 슾지와 실개천을 따라 불쑥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사랑이여, 기쁨이여 봄이여, 가슴이 설레고 있다. 해가 비추는 한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 휄리치아 만일 당신이 그곳에 있을수만 있다면. 지금 땅은 부드러우며 아이들이 땅을 파고 놀기에 좋은 진흙이 있으며 이웃농장의 어린 염소들처럼 껑충꺼충 뛸 수 있는 방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나라엔 당신을 위한 집도 당신남편을 위한 일자리도 없다. 도시엔 구호소 같은 형편없는 집들이 있고 인간의 따스함이 있으나, 포장도로는 인간의 탐욕만큼 딱딱하고 아이들을 위한 깨끗한 진흙이 없으며 오직 사람들의 오물만이 있을 뿐이다.

이 나라는 지금 아! 기쁨이 없다. 그리고 휄리치아가 사는 도시에는 비애와 궁핍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휄리치아, 걱정하지 마세요, 하느님께선 조롱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사람들은 형제들이예요. 그러니 당신의 가슴을 펴세요. 항상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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