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에 관하여 - 티치아노의 '가시관을 쓰시는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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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에 관하여 - 티치아노의 '가시관을 쓰시는 그리스도'
  • 김혜경
  • 승인 2022.08.3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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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의 명화 속 사유와 현실-2

‘체념’ 혹은 ‘자기를 내려놓음’이라는 표현으로, 미술사에 ‘팔리노디아(Palinodia)’라는 말이 있.다. 이는 부사 팔린(πάλιν, pálin, ‘다시’ 혹은 ‘뒤로’)과 명사 오데(ᾠδή, ōdé, ‘노래’)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다. ‘앞서 말한 문장과 반대로 말한다’라는 시적 표현에서 온 것으로 ‘취소하는 문장’, ‘철회하는 노래’라는 의미지만, 이것이 어떤 작품에서 주인공의 특정 행위와 연결될 때, ‘자기를 놓아버린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예컨대 단테(Dante Alighieri)는 『신곡』 〈지옥(Inferno)〉편, 제5곡에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사연을 듣고 세속적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씁쓸하게 회고하는 한편, 프란체스카의 처지를 이해하며 그녀와 함께 괴로워하다가 의식을 잃어버린다. 고통에 몸을 떨며 자기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자기를 놓아버리는’ 행위와 유사한 것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케노시스(kénosis)’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느님이 당신을 낮춘 행위로 ‘자기 비움’이라고 해석한다. 이 말은 자신을 완전히, 총체적으로 비운다는 의미다. 성탄과 십자가의 구원행위에서 등장한다. 팔리노디아와 유사한 말로 보이지만, 둘은 인간적인 관점과 신적인 관점이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팔리노디아를 어쩔 수 없이 내려놓는 ‘체념’으로, 케노시스를 인간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적극적인 행위로서 ‘자기 비움’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The Crowning with Thorns is a painting by the Italian Renaissance master Titian (Tiziano Vecellio)
The Crowning with Thorns is a painting by the Italian Renaissance master Titian (Tiziano Vecellio)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90~1576)는 〈가시관을 쓰시는 그리스도〉라는 주제의 그림을 두 개 버전으로 그렸다. 첫 번째 버전은 루브르에 있고, 두 번째 버전은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에 있다.

공통점을 살펴보면, 그림의 주제뿐 아니라, 구성이 매우 비슷하다. 배경에 등장하는 굵은 돌로 만든 벽과 로마를 암시하는 듯한 아치 형태의 문, 여섯 명의 인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고문자들이 들고 있는 막대기와 그것이 표현하는 대각선 구조 등이다. 동시에 전혀 다른 몇 가지 특징도 엿보인다. 전작인 루브르 버전에서 등장하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흉상은 뮌헨 버전에서 현대적인 샹들리에로 대체되었고, 배경의 어둠은 죽음을 앞둔 번개와 폭풍우 치는 하늘로 바뀌었다. 고문자들의 옷도 전자는 갑옷이나 금속으로 만든 옷이지만, 후자는 일반 옷으로 갈아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극명하게 다른 것은 파토스다. 오늘 말하려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파토스가 두 작품을 가르는 중요한 키워드다. 각자의 버전으로 들어가 보겠다.

루브르 버전은 1542-44년, 티치아노의 나이 쉰을 갓 넘긴 시점에서 그린 것으로, 신체의 조형적인 힘과 인물의 극적인 감정 상태를 잘 묘사했다. “로마 학파(scuola romana)”로 알려진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를 통해 드러난 중요한 혁신인 신체의 조형성과 감정을 습득한 걸로 보인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매우 인간적이다. 고통에 몸을 떨며 절규하고 있다. 고통에 순응하지 않는, 인간이 극적인 고통에 직면하여 표출되는 감정 상태를 그대로 표현했다. 구성은 수평도 수직도 아니다. 계단 위 불안정한 의자에 앉혀놓고, 배경을 어둡게 처리함으로써 인물을 구석으로 몰아놓고 강한 빛으로 조명하는 것 같다. 인물들은 조각을 그린 것처럼 신체가 강하다. 네 명의 고문하는 사람들의 육체에서는 라오콘 군상에서 보는 것 같은 헬레니즘 조각을 떠올리게 한다. 색채 역시 격정적인 감정을 대변한 듯, 선명하다. 이렇게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색조를 통해 인물들의 무게를 덜고, 볼륨을 전체적인 구성에 종속시키는 듯하다.

 

한편 뮌헨 버전은 1570-76년 사이, 티치아노의 생애 거의 말기에 해당하는 86세를 전후로 그린 것이다. 전작을 완성한 지 30년도 더 지난 뒤, 같은 주제로 그린 이 그림은 그을린 샹들리에 아래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로 일관되어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눈을 감고 조용히 이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다. 어떠한 반응도 취하고 있지 않다. 인간적으로는 체념이고, 신적으로는 자기 비움의 전형이다. 구도는 여전히 비대칭적이고 고문자들은 자기들끼리 얽혀 있다. 색은 붓이 빠르고 짧게 지나간 듯 펼쳐져 있고, 형상은 얇은 조각처럼 묘사되어 있다.

화가며 수필가인 조반니 파올로 로마초(Giovanni Paolo Lomazzo, 1538~1592)는 티치아노의 마지막 이 그림을 두고 “무섭고 날카로운 조명”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고통에 절규하는 게 아니라, 고통스러운 체념을 부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베네치아 학파의 거장인 티치아노의 성숙한 스타일과 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젊은 시절의 밝은 음색을 버리고 미켈란젤로의 “안-완성(non-finito)”에 버금가는 강하고 어두운 느낌의 그림을 완성한다. 노년기, 정치적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은 작가가 자신의 상태와 마음을 반영한 것으로, 전작에서 보던 구성과 조형의 엄격함이 어둠으로 대체되는 것 같다. 멀리서 보면 황갈색으로 거의 단색처럼 보이지만 빛으로 조명된 음영이 무한하다. 이것은 작가의 노년기 독창적이고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이런 혁신적인 테크닉은 뮌헨 버전에서만 볼 수 있는 극적인 측면과 표현의 긴장감을 강조한다. 보는 관점의 중요성을 잘 알았던 티치아노는 이런 “안-완성(non-finito)”의 완성을 관객에게 넘긴다. 그가 구사하는 이미지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모호한 형태이고, 그것을 통해 나머지 부분을 관객에게 제안하는 것이다.

 

김혜경 세레나
부산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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