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우리 편, 정말? -국가주의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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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우리 편, 정말? -국가주의를 넘어서
  • 이연학 신부
  • 승인 2022.08.3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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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학 신부의 [영성의 우물에서 길어올린] 정체성 1: 교회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사람들은 선명하고 강력한 정체성을 원한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은 정체성과 관련해서 벌어지는 교회 안팎의 현상에 대해 모종의 영적 식별을 실천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 신학적 식별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식별의 대상 자체가 근원적으로 정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오는 곱지 않은 시선은 사실상 피할 수 없다.     

스즈키 다이세츠의 경우

20년쯤 전, 한 잡지에서 이런 글을 접하고 놀란 적이 있다.

“젊은 승려 스즈키는 청일전쟁(1894-1895년) 때 마침 불교와 국가·종교 관계에 대한 글을 발표해 ‘애국 불교’ 이론가로서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스즈키에 따르면 선불교의 깨달음 체험이 생사를 초월하는 이상 견성했거나 선 수련의 경력이 깊은 사람은 자신과 남의 목숨에 집착하지 않는다. 즉 호법과 호국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도 버리고 남의 목숨도 빼앗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시끄러운 야만인인 중국인을 평정하기 위해 무아경에 도달해 자신과 남을 쉽게 희생시키는 것이야말로 보살도라는 게 스즈키의 결론이었다”(박노자, ‘불교와 파시즘의 기묘한 만남’, ‘한겨레21’, 2002년 6월 5일 자). 

기사에 충격을 받은 것은 스즈키 다이세츠(1870-1966년)를 학자로서뿐 아니라 선사(禪師)로 존경해 온 터였기 때문이다. 이 글이 사실(史實)에 충실한 묘사임은 이후 여러 경로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일본 조동종 승려요 불교학자 브라이언 D. 빅토리아는 일련의 엄밀한 역사 연구를 통해 스즈키를 포함한 일본 불교 지도자 대부분이 당시 이런 태도로 일관했고 패전 뒤에도 제대로 뉘우치거나 사과하는 데 인색했다고 증언했다(「전쟁과 선」, 2009년; 「불교 파시즘」, 2013년 참조). 

심오하고 호방한 선의 경계와 노골적인 파시즘이 어떻게 한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몇 년 전에야 나름의 답을 얻게 되었지만 이에 대해선 다른 기회에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정체성이란 주제에만 초점을 맞춘다.

스즈키나 다른 승려들에게 ‘대일본제국 국민’이라는 자의식과 ‘불제자’라는 자의식은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뒤엉켜 있었다. 천황주의적 국가주의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불자로서의 정체성을 ‘흡수 통일’해 버려, 결국 후자는 전자에 복무하는 역할을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기꺼이. 교리가 정치권력을 이처럼 내밀하게 뒷받침할 때 우리는 이를 ‘이데올로기’라 부른다. 

교회사의 경우

이런 경향이 당시 일본 불교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현재 미얀마나 스리랑카를 비롯하여 상좌부 불교 지역의 경우 ‘불교 근본주의’의 위험이 절대 가볍지 않다. 이슬람권의 근본주의에 대해선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모두를 어찌 ‘남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으랴. 교회사에도 초창기부터 정치와 교리가 뒤섞인 경우가 있었고, ‘그리스도교 근본주의’도 현재진행형이다. 

최초의 교회사가로 알려진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오(263-339년)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지어 바친 ‘황제 찬가’는 경신례에 근접하는 찬양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측근’으로서 황제권에 대한 신학적 합리화였단 점에서 ‘용비어천가’를 훌쩍 뛰어넘는다.

에우세비오의 ‘제국 신학’은 이데올로기의 전형적 예에 불과하다(E. 다스만, 하성수 역, 「교회사」 II/1, 분도출판사, 98-105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 셔뉘는 공의회를 앞두고 누대에 걸쳐 교회 안에서 암암리에 지속된 ‘콘스탄티누스 주의’의 종말을 선언했지만(M.-D. Chenu, Un concile pour notre temps, 1961), 교회 안팎에서 종교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와 맞닿은 경계선을 넘나들며 위험한 줄타기를 거듭해 왔다고 말해야 하리라.

이와 관련하여 교회사에서 생략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예는 17세기 프랑스 교회에서 발흥한 이른바 ‘갈리카니슴’일 것이다. 교황수위권을 크게 제한하는 권리를 ‘프랑스 교회’에 요구하며 종교 정치적 국수주의를 추구한 갈리카니슴은 “위대한 프랑스”(la grandeur de la France)의 깃발 아래 사실상 국가교회를 건설하려던 시도였다. 사정은 미국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 본당이나 가톨릭 학교 입구마다 “하느님과 조국을 위해”(pro Deo et Patria)란 휘장이 걸려 있었다. 히틀러의 제삼제국 시대 독일을 풍미하던 “Gott mit uns.”(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시다.)란 구호의 끔찍한 (정치) 신학적 왜곡을 상기시킨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심을 믿느냐는(또는 “우리가 남이가?” 하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우리’가 과연 하느님 편이냐 하는 질문이다. 전자는 이데올로기에서 나오는 것이고 후자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깃발’은 중국 문화혁명 시절 철없는 홍위병뿐 아니라 멀쩡한 그리스도인마저 흥분시키며 복음과 아무 관계 없는 구호 아래 편 가르고 줄 세우는 마법을 발휘한다.

 

사진출처=voakorea.com
사진출처=voakorea.com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그렇다면 초세기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어떤 자의식을 지녔을까? ‘나그네요 이방인’(1베드 1,17; 2,11 참조)으로서의 자의식임이 너무도 분명하다. 이런 자의식은 초세기 익명의 저자가 쓴 「디오그네투스에게」에도 선명히 드러난다. 세상 중심부의 ‘주류’가 아니라, 변방에서 차별과 박해를 감내하는 ‘디아스포라’야말로 교회의 출처다. ‘성문 밖’, 그리고 ‘진영 밖’의 작고 가난한 자리에서만(히브 13,12-13 참조) 교회는 세상과 ‘다르게’ 살 수 있다. 곧, 지상에서는 그 어떤 민족적 문화적 정치적 ‘진영’에도 궁극적으로 소속되지 않기에 ‘세상의 영혼’이 될 수 있고 정녕 ‘가톨릭’(katholikos, 보편적)일 수 있다(「디오그네투스에게」, 6 참조). 

저자의 이런 관점은, 거의 20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말씀의 칼로 신앙과 이데올로기를 선연히 식별하는 선을 긋도록 도와준다.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던 근엄하고 우렁찬 목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는 듯하다. 한동안 교회가 지속해서 가르친 사회 교리가 주효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구교를 막론하고 그렇게 말하던 이 가운데 많은 이가 언제부턴가 거리로 쏟아져 나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노골적으로 정치에 간여하는 현상 또한 이유가 되리라. 

어차피 종교가 이렇게 정치와 깊은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면, 교황 말씀대로 정치를 “사랑의 탁월한 형태”(제52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2019.1.1)로 인식하고 교회의 사회 교리에 따라 복음적 정치 식별과 실천을 위해 애쓰는 게 훨씬 더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가 아닐까.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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