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수고를 생각하며
아침에 잠을 깨운 것은 마을 이장님이 하는 마을 방송 소리였다. 가뭄이 심해 마을의 공동수조에 물이 없어 내일 저녁까지 단수를 할 예정이니 필요한 물은 미리 받아놓으라는.
급하게 세탁기를 돌려 모아놓은 빨래를 하고, 10리터들이 물통 하나와 두 개의 세숫대에 물을 받아놓고 나니 뿌듯하다. 꼭지만 돌리면 수돗물이 펑펑 쏟아지는 곳에서 살았을 때는 몰랐다.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물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내가 별다른 불편함 없이 하루를 지낼 때에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수고가 깔려있기 마련이니, 그들의 노고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적당한 고립과 적당한 소통
“적당한 고립감과 적당한 소통. 이 둘을 함께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귀촌 생활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 고립을 두려워하면 자기 삶이 없어지기 쉽고 소통에 집착하면 이리저리, 자칫 편가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된고, 그러다 결국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기도 하고. 난 지금 이 둘의 균형을 잡으면서 나름 편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낯선 곳에 혼자, 뚝 떨어뜨려 놓은 것 같아 걱정이 된다는 친구에게 오늘 아침에 했던 말이다.
귀촌한지 꼴랑 4개월인 지금, 이 생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리고 나처럼 혼자 있는 것을 그닥 무서워하지 않는 성격의 유형으로선 별로 변할 것 같지 않다.
얼마나 자신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으면
“내가 누구(주로 유명인)를 알고, 누구누구와 친하게 지내고, 내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아!”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제법 알려진 정신과 의사인 형제가 자신들의 유튜브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단지 ‘안다는 이유’만으로 도와주는 사람, 없어요.
세상살이, 그렇게 만만치 않아요!”
거기에 더해 내 생각을 한마디 덧붙이면, “당신이 누구누구를 안다는 것이 당신이란 사람을 설명하거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되지 않아요. 오히려 난 당신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게 돼요. ‘얼마나 자신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으면 저 사람은 저걸 내세울까?’하고.”
문지온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하면서 몇몇 문학상을 수상했다. "글을 통해 따뜻함에 이른다"는 뜻으로 필명을 문지온으로 정했다. <남은 자들을 위한 800km>(ekfrma, 2016)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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