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 나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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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 나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 최태선
  • 승인 2022.08.3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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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중세 암흑시대는 인간의 이성을 촉발했다. 바야흐로 이성의 시대가 열리고 인간은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계몽주의는 용기 있는 인간을 만들어냈지만 그러나 그 용기로 인간은 자기를 숭배하는 ‘me generation’이 되었다. 인간은 자기를 숭배하는 존재가 되었다.

자기를 숭배하는 존재라는 말은 인간에게 거북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의 인식 깊은 곳에는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사고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의 이성이 선악을 판별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역사의 중심으로 작동하는 것이고, 그렇게 개개인이 된 인간들의 선은 하느님의 정의는 물론 합리적인 공동선으로도 수렴될 수 없다.

결국 역사는 힘을 가진 자가 주도하는 전체주의가 될 수밖에 없으며, 이런 세상에서 타인이란 죽이거나 극복해야 할 경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인간의 역사에서는 주기적으로 카인의 외침이 울려 퍼질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나는 이 간단한 질문에서 세상과 인간의 실존을 생생하게 파악한다. 인간은 아우인 아벨을 지키는 자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것을 책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상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가.

신자유주의라는 이 시대의 옷을 입고 있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모두가 자신은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의 인생은 스스로 책임져야한다. 능력에 따라 경쟁하고 그에 따른 결과는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라는 것이다. 제로섬게임은 그러한 세상의 가장 현저한 질서이며 정의이다. 누구도 개인의 몫에 손을 댈 수 없다.

간단하지만 지금 내가 전개하고 있는 글은 전적으로 하느님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으로 존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유의 대가는 생명이다. 자신이 아우를 지키는 자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자신도 아우가 될 수 있다. 죽은 사람은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죽고 죽이는 인류의 역사는 반복된다.

그렇지 않은 역사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깨닫고 말한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인생무상, 공수래공수거”

그러나 이런 깨달음을 얻고도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출가하여 속세를 떠나는 길도 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기에 절망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라고 말한다.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잘 생각해보라. 복음은 이처럼 인류를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하고자 한다. 복잡하지 않다. 아우인 아벨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카인의 후예들은 자신의 이성을 무기로 자신이 자신의 인생은 물론 세상의 주인이 되려는 허무한 꿈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 허무한 꿈을 내려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많았다. 더욱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들은 사람들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없다. 있다고 해도 거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내가 간략하게 전개한 인류의 역사를 전제로 한다. 물론 계몽주의 이전의 말씀이지만 계몽주의는 인간의 실상을 두드러지게 했을 뿐 그 이전과 다름이 없다.

예수님의 요구는 창조의 회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자신의 생각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인간이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라는 믿음을 가지려면 인간은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있다고 믿었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는 자신의 사고를 버리고 오직 선하신 분이신 하느님에게 자신의 의탁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인간의 정체성이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을 지키는 자에서 아우를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다. 수 틀리면 죽여야 하는 인간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이처럼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하느님이 하느님 되시고, 세상 역시 달라진다. 모든 것이 창조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런 예수의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와 정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가. 그래서 나는 예수의 제자 됨이야말로 그리스도인 됨의 출발점임과 동시에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단순히 ‘급진적인 제자도’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단편적인 사고이다. 예수의 제자 됨은 구슬이 목걸이가 되는 것과 같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한 걸음 물러나 잘 생각해보라. 얼마나 정확한 그리스도인 이해인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십자가의 은총을 알 것이다. 십자가의 은총을 안다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가인의 후예들의 삶을 살 수 없고, 제로섬게임을 질서와 정의로 인식할 수 없게 된다.

복음은 복잡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성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살던 인간이 그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도 달라진다. 세상도 달라진다. 타인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더 이상 돈이 주인노릇을 할 수 없다. 아우를 지키는 자가 되어 몸으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된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제자들의 사회이다.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교회는 ‘산 위의 마을’이 되고 복음은 인류의 희망이 된다. 이것이 하느님의 경륜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느님의 경륜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하느님은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으신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예수의 제자라면 이 질문에 “저와 함께 잘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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