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왜 항상 뚱뚱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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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왜 항상 뚱뚱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지요?"
  • 도로시 데이
  • 승인 2022.08.2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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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11-가난의 얼굴

가난은 이상하고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30년 동안 가난 그리고 가난의 기쁨과 슬픔에 관하여 쓰려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내가 가난의 대해서 무엇을 느끼고 또 무엇을 느끼고 싶은지를 전달하지 않고서도 또다른 30년 동안 가난에 관하여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난을 단죄하는 동시에 옹호한다. 가난은 단순하며 동시에 복잡하다. 가난은 사회적인 현상이며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난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며 역설적인 것이다.

우리는 늘 가난에 관하여 숙고하고 글을 써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가난의 희생자들 사이에 있지 않게 되면, 가난의 실재가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난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안락함 속에 갇혀버린 사람들이 가난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방문하는 많은 선의의 사람들은 그들이 어떻게 가난 속에서 자랐는가를 우리에게 말하는데, 그들의 부모들은 함께 힘을 모아 힘든 일을 하면서 자녀들을 교육시켰고, 심지어 교회의 사제들과 수도자들로 만들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한때 그들이 살 수 밖에 없었던 빈민가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건강한 습관과 안정적인 가족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가난의 계층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주장한다.

논쟁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왜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는가? 아니다, 이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모른다. 가난의 관한 그들의 개념은 한 수도자의 독방과 같이 깔끔하고 잘 정돈된 어떤 것에 불과하다.

가난은 많은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은 홀로 공간 안에서 가난하게 될 수 있다. 지난 달에 나는 아내, 네 명의 자녀들 그리고 친척들과 함께 방이 네 개 있는 아파트에 사는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정규직업이 있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지만, 햇빛과 공기와 공간에 있어 가난 하다. 우리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한번은 피터 모린 농장에 있는 여성들의 기숙사가 꽉 찬 적이 있었다. 또 다른 방문객이 왔을 때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서 살았다.

겉보기엔 그럴듯한 경제적 여건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들은 영원히 재정난의 두려운 고비 속에 있다. 죠지아와 사우스 캐롤리나를 방문하는 동안 나는 수소폭탄 제조소 가까이 있는 아우구스타 주변의 이동식 수용소들을 보았다. 이동하며 사는 건설노동자들의 가족들은 거대한 이주인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편리한 이동집을 가지고 있지만, 좋은 생활을 위한 다른 물리적 여건들을 살펴볼 때는 가난하다. 임금의 아무리 올라가도, 갑작스러운 병과 치료비의 누적은 빈곤 상태에 급강하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이 불확실함 때문에 공포에 떨게 되고, 그것에 대한 두려움은 미국전체의 병원들이 꽉 찰 때까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 압박에 사람들을 굴복시키게 하는 것이다. 참으로 여기에 가난의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유능한 전문가들을 데리고 있는 백만장자들, 동전 한 푼의 이익까지 셈하는 상인은 모두 부를 축적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의 예를 따르고, 몸과 정신이 건강하다면 요즘에는 아무도 가난해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환대의 집들이 여전히 가득차며 더 많은 방을 우리가 원한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비참하게도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우리에게 보내오고 있다.

더 분명하고 익숙한 가난의 모습은 빈민가의 가난이다. 우리는 그런 빈민가에 산다. 빈민가는 점점 푸에르토리코 사람들로 가득차고 있는데 그들은 도시에서 가장 적은 임금을 받으며 가장 힘들고도 비천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궁핍과 착취 때문에 영양 실조에 걸려 있다. 우리는 가톨릭일꾼에 들어오는 작은 치수의 옷들을 치우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먹으며 겉모습을 날씬하게 유지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옷들을 가져다 준다.

우리를 위해 옷방을 간수하는 앤 메리는 “왜 항상 뚱뚱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그들에게 꼭 맞는 치수의 옷들이 결코 충분한 적이 없었어요.” 라고 말하곤 하였다. 우리에게 오는 가난한 사람들은 탄수화물이 많은 음식을 먹기 때문에 뚱뚱할지 모르나 가난한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말랐다. 성 요셉의 집에 있는 옷장 안의 재고들이 지금은 더 빠르게 처리된다.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영양실조에다 헐벗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거 상태도 열악하다. 그들의 가족들은 해충과 어둠, 그리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비좁은 셋방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결코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번영을 널리 선전하는 이 시대에 거주할 곳과 삶의 기본적인 요구들이 우리 도시에 제기되는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가톨릭 일꾼 운동이 시작되었던 1933년에는 원하는 대로 모든 아파트들을 빌리는 것이 가능했었다. 누구든 “낡은 셋방들” 안에 집을 가질 수 있었는데, 낡아도 여기에서는 물과 화장실, 그리고 기름과 올챙이 난로로 난방도 꽤 잘 할 수 있었다(그러한 난방은 스팀보다 꽤 좋았는데, 스팀열은 밤에 너무 일찍 식었고, 따뜻한 봄이나 가을에도 열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택 개량사업은 수천 채의 오래된 건물들을 개축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반면에 새 집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시의 공공주택들은 실업자, 이민 온 독신남자들과 가족들로 가득 찼고, 남아있는 낡은 셋방들은 철거되어 몰려온 사람들로 엄청나게 포화상태였다.

수년전엔 아이들이 5명인 가족도 아파트를 빌리는데 문제가 없었다.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오늘날 뉴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젊은 가족들은 자리를 “구매” 해야만 하는데, 은행대출, 군인대출 혹은 친척들과 친구들로부터 돈을 빌려 계약금을 마련해야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집 계약금을 모을 때까지 모든 비필수품들을 엄격하게 스스로 사지 않는 방법도 썼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집을 소유하거나 아파트를 세낼 수 있는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우리는 빚과 저당 잡힌 사람들의 국가이며, 그래서 이런 빚들과 할부금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들이며, 가족들은 이제 실제로 가난 속에 살고 있다. 얼굴만 바꾼 가난 속의 사람들인 것이다.

 

by Fritz Eichenberg
by Fritz Eichenberg

글을 쓰고 있는 내 앞에 프리츠 아이젠버그가 그린 빈첸시오 성인의 초상화가 있다(퀘이커 교도인 프리츠는 <가톨릭일꾼> 신문에 목판화를 그린다). 빈첸시오 성인은 팔에 통통한 아이를 안고 있으며 마르고 창백한 아이는 그에게 달라붙어 있다. 그렇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 하셨듯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게 될 것이고, 우리가 나누어야할 필요도 항상 있을 것이며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하여 우리가 벌거벗어야할 필요도 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늘 그렇듯이- 일생에 걸친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게 하려고 하신 것은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계급 투쟁은 우리가 만들고 있으며 우리의 동의에 의한 것이지 그분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을 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일꾼에서 우리는 신용조합과 공동협동체, 상호부조를 위한 연맹, 자발적인 토지개혁과 공동농장 같은 방법들을 주장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행해진 너무도 많은 죄악들이 하늘높이까지 울려 퍼진다! 가장 지독한 죄악들 중 하나는 일꾼에게서 그의 품삯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또 다른 죄악은 노동자에게 너무나 허황되고 충동적인 욕망을 주입시키고 채우기 위하여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자유와 명예를 기꺼이 팔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현세욕을 지닌 죄인들이다. 그러나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광고업자들(그 세대들에게 화가 있으라)의 집단은 의도적으로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 결과는 가족들의 타락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힘껏 사회악의 원인들과 싸워서 널리 퍼진 사회악들에 대항해야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싸움의 책임은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가 전해 받은 이 메시지는 십자가로부터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는 세상의 가난과 굶주림에 대항하여 싸워 왔다. 우리의 응답은 매우 미국적이었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을 청소하려고 했으며, 그래서 더 크고 더 좋은 구호소와 병원들을 지었다. 이 나라에서는 바라건대, 비참함이 효과적이고도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다루어져 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한 책임을 점점 더 많이 맡고 있는 거룩한 어머니인 이 나라와 함께 더 많은 일을 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애덕은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만큼만 따뜻한 법이다. 침대보가 절룩거리고 노쇠한 사지 때문에 구겨지지 않는다면, 침대 옆의 탁자가 아주 적은 것들로 집을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난장판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이웃들을 돌보는 우리들의 관심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우리는 잘알고 있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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