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온재(心溫齋)에 깃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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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온재(心溫齋)에 깃들다
  • 문지온
  • 승인 2022.08.21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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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온의 심온재 이야기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넌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고 싶어?” 오랜 친구가 물었다. 봄꽃이 화사하게 피어날 무렵이었고, 원주에 있는 작은 일식집에서 나의 회갑을 축하하는 만찬을 나눌 때였다. 그때그때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마음을 쫓아 살아왔던 내게 구체적으로 세워둔 노년의 계획은 없었다. 바다가 있는 마을에서 조용히 글을 쓰면서 세상살이에 마음을 다치거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찾아오면 편하게 쉬어가도록 방 한 칸과 마음 한 켠을 내어주며 살다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잠에 들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은 있었지만.

그때는 언감생심이라 여겼던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친구는 말했다. “(네 소망은) 이루어질 거야!”. 담담한 얼굴로 선언하듯, 자신 있게 말하는 친구를 보면서 생각했다. ‘글쎄, 그럴까?’. 하지만 고맙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내 처지, 경제적인 것은 물론이고 몸과 마음도 벼랑 끝에 서 있는 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친구가 힘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 생각했기에 그 마음이 고마와서. 물론 책으로 읽어 ‘소망은 그 자체로 강력한 에너지이며, 스스로 자신을 이루어가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내 안에 ‘믿음’으로 새겨지기엔 살아오면서 겪었던 좌절과 절망의 경험이 너무 길고 잦았다.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할 만큼.

그런데 ‘말의 힘’이란 게 이런 것일까? 아니면 믿기지 않지만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만찬 자리에서는 흘려들었던 친구의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만 떠올랐다. “이루어질 거야!”. 문득문득 누군가 내게 속삭이는 것처럼 그 말이 떠오를 때면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이는 광경을 볼 때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연녹색 희망 같은 것이 느껴졌고. 외적인 상황은 변함이 없는데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 작지만 뚜렷한 변화가 신기하면서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말이 생각났다. 소망은 그 자체로 커다란 에너지이며 스스로를 성취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고흥에 작은 집을 마련했어. 바다 근처에 있는 조용한 마을이야. 혼자 글 쓰면서 살기도 좋고, 방이 두 칸이라 손님이 찾아와서 쉬어갈 수 있어. 원한다면 네가 그 집에서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해봐.”

성탄이 가까울 무렵, 오랜만에 전화해온 친구가 말했다.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이루어질 거야!” 하는 말에 힘은 얻었어도 이렇게 갑자기, 내 편에서 별다른 수고도 하지 않았는데 이루어질지는 몰랐다.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집에 깃들어 사는 동안, 나도 마음 따습게 살고 인연이 되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심어주며 살겠다 약속했다.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며칠 후 당호(堂號)를 지어보냈다. 춥고 차가운 세상에서 마음을 다친 사람들이 힘과 위로를 얻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집이란 뜻에서 “심온재(心溫齋)”라 지었다는 설명과 함께.

 

사진=문지온
사진=문지온

이사 갈 날짜를 정하고 친구와 지인들에게 알렸다. 돌아온 반응은 대개가 걱정이었다. “고흥이라고? 멀어도 너무 멀다!” “벼랑 끝에 서있는 삶이라더니 진짜 땅끝으로 가는구나! 그런데 괜찮겠어? 문화도 다르고 정서도 다른 곳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여자 혼자 뚝 떨어져서 살려면 힘들텐데...” 단 한 분, 젊은 시절 함께 책 작업을 한 적이 있는 노(老) 신부님은 송별 만찬을 마련해주시며 물으셨다. 왜 고흥으로 가는 지, 땅끝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그리고 헤어질 때 축복과 함께 따뜻하게 안아주시며 말씀하셨다. “아가다, 땅끝은 벼랑 끝이나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야. 두려워하지 말고 떠나거라. 그곳에서 네가 어떤 하느님을 만날지 기대가 되는구나.”

연이은 한파로 거리가 꽁꽁 얼어붙었던 날, 원주를 떠나 고흥으로 이사를 했다. 박스 몇 개가 전부인 이삿짐을 친구의 차에 싣고 여섯 시간가량 달리는 동안, 나는 머릿속으로 심온재의 소유자인 친구와 맺을 계약서의 문구를 작성했다. 친구는 자기를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니 아무 조건 없이 편안히 머물며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지만 나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친구가 하느님의 선물을 내게로 흘러보내는 통로라면 나도 하느님의 통로가 되어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좋은 것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심온재에 관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심온재를 풍성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을 적은 약속의 문서. 대강의 내용은 이랬다.

- 심온재의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 심온재는 삶의 어려움이나 마음의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기쁘게 맞고 소찬일지언정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비롯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기꺼이 제공하고 기쁘게 나누는 공간이다.

-심온재의 소유자와 거주자는 자신이 가진 능력과 달란트를 심온재를 찾아오는 사람들, 특히 인생에서 길을 잃고 헤매거나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젊은이들을 돕는데 아낌없이 사용할 것을 약속했고, 이 아름다운 약속을 지킬 의무와 책임이 있다.

석양이 질 무렵 심온재에 도착했다. 키 작은 나무 대문을 열었을 때 잔디가 깔린 작은 마당이 나타났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한 달 후면 이 작은 마당에서 일어날 기적들, “오, 하느님!” 하고 연신 감탄할 생명의 씨앗들이 숨어있는 줄도 모르고 심드렁하게 마당을 내려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조안 말루프(Joan Maloof)의 말을 생각했다.

“우리는 달나라에 가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의 뒷마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다.”

 

문지온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하면서 몇몇 문학상을 수상했다. "글을 통해 따뜻함에 이른다"는 뜻으로 필명을 문지온으로 정했다. <남은 자들을 위한 800km>(ekfrma, 2016)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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