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하느님과 맘몬... 후원금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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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하느님과 맘몬... 후원금에 관하여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08.09 1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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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도로시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쩌나!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요?” 그러자 그는 말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네요.”(데레사 머레이 수녀)

돈과 재산에 관한 도로시의 태도는 신앙으로 꽉 차있었고 또 한편으로 실용적인 것이었다. 가톨릭일꾼이 돈을 필요로 할 때, 일꾼들은 신뢰를 갖고 하느님께 청했는데, 때때로 단식을 하거나 가까운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계속하는 방식이었다. 또 한 가지 청하는 방식은 인근지역의 이태리계 이웃에 의하면 부동산에 관한 문제에 강력한 중재역할을 한다는 요셉성인에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가톨릭 일꾼들은 사무실에 항상 모셔져 있는 요셉성인 상 밑에 청원서들을 끼워 넣곤 했다. 매리 더닌은 뉴욕의 일꾼 초기시절에 일어났던 재정의 기적과 돈을 만지자마자 썼던 상황을 기억한다:

❧ 가톨릭일꾼 공동체의 덕목은, 보통 우리가 두려워하는 “불확실함”이었다. 한번은 콘 에디슨이 와서 대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전기를 끊겠다고 위협했다. 그런데 도로시가 방금 도착한 어느 편지를 열었을 때 그 속에는 전기 값과 똑같은 수표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았다! 그리고 이스톤 농장에서도 불확실함을 실천했다. 우박이 농작물을 때렸으나, 우리는 어쨌든 계속 해나갔다. 희망은 영원하다.

정부에 대한 도로시의 불신은 항상 일꾼 공동체의 경제문제에 영향을 미쳤다. 데레사 머레이 수녀가 회상한다:

도로시가 크리스티가에 있는 일꾼집을 시에 팔았을 때 시 당국은 도로시에게 웃돈을 줄려고 했다. 무슨 이자돈이나 다른 어떤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도로시는 받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물었을 때, 도로시는 그들에게 돈이란 상품이 아니라, 단지 교환의 매개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도로시는 그 사실을 몸으로 살았던 것이다. 돈은 일꾼에 들어와서 곧장 나가곤 했다. 독자들에게 도움을 청원할 필요가 있으면, 그렇게 했다.

나는 한번, 도로시에게 정부로부터 돈을 받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난 정부에게서 공립학교 교육을 받았다”고 답변했다. 그는 “거룩한 어머니 국가”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한번은 가까이 있는 시립 '남자들의 집'을 둘러본 적이 있었다. 도로시는 시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대우하는 것을 보고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았으나, 자신은 정부로부터 돈을 받지 않았다. 재단으로부터도 받지 않았다.

도로시는 그가 살고 있는 인격주의의 원칙을 거대한 정부가 위반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보수주의자들은 자주 도로시가 그들 편이라고 주장했는데, 그가 중앙집권 정부를 반대하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정부지원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워싱턴에 지지자가 없는 도로시는 급진주의자였으며, 반동주의자가 아니었다. 에드 터너가 이 구분을 정확하게 수정한다:

❧ 중앙집권 정부에 반대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복지국가”에 대한 반동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그것은 지독한 거짓말이다. 그는 일생 내내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딸의 가족 또한 뉴욕시의 가톨릭일꾼 가족과 그 밖의 다양한 “농장들”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했다. 그리고 물론 가톨릭 일꾼은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항상 격려하여 혜택을 받도록 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행정체제가 꼬였을 때 일꾼 공동체의 일꾼들이 개인적으로 손님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일꾼들은 복지 기관에 소위 “대상자”들과 함께 가서 해야 할 일을 잘 정리한다. 서류가 필요하면 그렇게 한다. 다른 한편 도로시는 “정부가 준 것을 정부가 가져갈 수 있다.” 고 이해했다. 한 번은 신문에 이런 제목이 나간 적도 있다: “거룩한 어머니 국가.”

도로시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도운다면, 정부의 기관을 통해서든, 아니면 일대일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한다면, 무료 급식을 위한 줄서기가 없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빌 그리핀은 도로시가 “사회는 가족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톰 코넬은 일꾼 공동체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때를 기억한다:

❧ 그 때는 참으로 매우 매우 어려웠던 때였고, 가톨릭일꾼 역사상 최하위에 도달한 것 같았다. 크리스티가의 집은 시가 압수했다. 새로 들어갈 집을 찾기 힘들었고 아무도 도로시에게 집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크리스티가 175번지에 가게 집을 빌렸으나 주위의 아파트들을 세내야 했다. 믿음보다 우울함이 컸다. 가톨릭 일꾼이 죽을 것처럼 보였다.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신문 독자도 2차 대전 후 별로 늘지 않았다. 식료품비용, 프린트 비용을 지불할 수 없었다.

이제 일 년 예산은 프린트 비용과 다른 모든 것을 합쳐 7만불보다 약간 적었다. 포드 재단이 도로시에게 65,000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1년 예산의 돈이었다. 도로시는 거절했다.

나는 “왜 입니까? 도로시” 하고 물었다. 도로시가 그 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왜 거절하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수년 동안 디트로이트의 포드 공장에서 일한 사람을 아는데 천식에 걸렸어요, 그런데 공장 측은 바닥에 카펫을 깔아주지 않았고, 나무조차 깔아주지 않았대요.”

나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도로시는 그때 그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대답을 하곤 했다. 몇 분 후 다시 물으면, 다른 대답을 한다. 물론 두 가지 대답 모두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대답들을 이어 맞추고 내가 알고 있는 도로시를 생각해 볼 때, 나는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는 빈틈이 없고 예리한 사람이었다. 보기보다 훨씬 더 빈틈이 없었다. 65,000불을 받으면 사람들에게 후원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 양심에 걸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은행에 예산이 있는데, 왜 적은 돈을 보내 달라고 할 것인가… 왜 나의 장인이 석 달마다 10달러씩 보내야 하나? 그러나 당신이 실제로 필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내는 적은 액수의 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일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며 일꾼과의 일치를 느낀다… 아주 적은 액수지만 실제이고,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 일꾼에 대하여 매우 존경할 만한 것은, 도로시가 은행에 돈을 지니고 있는 한, 신문에 절대로 청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이렇게 우리를 상기 시킨다:

도로시 데이는 결코 성공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성공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일꾼에 더 안전을 가져온다든가, 더 “전문적”이 되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 이를태면 주교들이나 정치가들과 관계를 맺는다든가 하는 방식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관심들과 배려들이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항상 느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성소에, 소화 데레사의 작은 길에 가까이 머물렀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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