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찌그러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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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찌그러든 사람들
  • 최태선
  • 승인 2022.08.2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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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목사로서 내가 쓰는 글은 사실 개신교를 대변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글은 개신교도 아니고 가톨릭도 아니고 제3의 종교개혁이라고 말하는 아나뱁티스트들의 입장도 아니다. 물론 동방정교의 입장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쓰는 글은 신앙의 자유 이전, 특히 교회가 성장하여 제도를 이루기 전의 초기교회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주장이 아니라 적어도 일군을 이루고 있는 다른 신학자들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작고하신 테드 제닝스와 같은 분은 그런 내게 큰 힘이 되어주신 분이시다. 그분은 그리스도교 역사를 그리스도교 이전의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그리스도교 이후의 그리스도교로 구분하였다. 그 기점은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의 자유이다.

구체적으로 내게 이런 관점을 가지게 한 공동체가 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이다. 부루더호프 공동체와 더불어 내게 이런 통찰을 가지게 한 교회는 세이비어처치이다. 이 두 곳의 신학은 하님 나라이다.

사실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사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잘도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교회를 위하면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선교를 하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교회도 선교도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되려면 많은 것이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미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그리스도교의 구조를 바꾸기란 불가능하다. 구조란 한 번 형성되면 본말이 전도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런 그리스도교를 보고 있다.

 

사진출처=catholicgentleman.net
사진출처=catholicgentleman.net

테드 제닝스는 그리스도교 이후의 그리스도교를 말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교 이전의 그리스도교와 같아져야 함을 역설했다. 누구라도 복음에 대해 눈을 떠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게 되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나라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구조 자체가 하느님 나라를 담을 수 없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의 구조는 너무도 공고해서 오늘날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계급구조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담아낼 수 없는 구조라고 생각한다.

사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구조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급구조는 근본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담아낼 수 없다. 특히 평신도들은 예수의 제자도 될 수 없고 그리스도인도 될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지배를 받는 하느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일 뿐이다. 성직자와 수도자들 역시 예수의 제자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도자들의 경우는 그 역할을 비교적 제대로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지배와 다스리는 것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직자를 도와 지배와 다스림을 공고히 하는 데 협력하는 한 이들 역시 예수의 제자인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가톨릭 신자들은 내가 하는 이야기에 공감을 하면서도 선뜻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신도의 역할에 대한 적응이 이미 끝난 상태이고 하느님 나라의 일을 위해 자신은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 존 듀이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존 듀이는 국가가 국민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국가가 국민을 억압해서 찌그러든 사람(dwarfs)으로 만들면 찌그러든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지적이 바로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번 억압을 받아 찌그러든 사람은 억압이 사라져도 찌그러지지 않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평신도들이 바로 이와 같이 억압으로 찌그러든 사람들(dwarfs)이다. 이렇게 찌그러든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라면 해야 하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 수 없다.

나는 이 사실을 단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 글이 가톨릭 매체에 실리고 가톨릭 신자들과 페친으로 지내면서 내가 더 깊게 확인하게 된 사항이다. 개신교의 경우도 평신도가 문제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톨릭의 경우는 개신교의 경우보다 더욱 이러한 현상이 현저하다. 그것은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공고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한 곳이다. 예수의 제자들이라면 다른 예수의 제자들을 다스리거나 지배하면 안 된다. 그것은 세상의 방식이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이 된 사람들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의 대인이 되면 어떻겠는가. 그것은 곧바로 하느님 나라의 사망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런 그리스도교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의 꿈을 위해 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전부로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일에 전념하면서 아멘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는 이들이 있는가.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은 새 이스라엘도 하느님의 백성도 될 수 없다.

많은 목사들이 내게 제자훈련을 통해 평신도들이 신실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그 신실한 삶이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인가. 단순히 작은 일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를 구성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삶은 생각처럼 간단하거나 만만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쟁과 차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의 평등을 이해할 수 없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평등은 단순히 똑같아 지는 정도가 아니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많이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산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 내 능력만큼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을 한 번 더 확인해보라.

예수의 제자와 그리스도인은 동의어이다.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지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곳은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고 하느님의 꿈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내 바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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