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노동의 거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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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노동의 거룩함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8.1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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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뜻밖의 소식

예수회 사제요 신비가인 테야르 드 샤르댕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되어 살아있는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으며 맛보는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가 일하거나 활동할 때 우리를 기다리신다. 펜이나 삽, 빗이나 바늘 안에도 계신다. 우리가 하는 일에 한 획, 한 줄을 긋고 한 땀 한 땀 뜨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정성을 기울이고 의지를 다해 완성해 나가면 최종 목표에 다다를 것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행하는 모든 노동이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일이다. 다만 그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껴야 한다.

전설에 따르면, 크리스토퍼 성인은 강을 건너는 여행자들을 등에 업어 강을 건너게 해 주는 일로 생계를 꾸린 거인이었다. 어느 날 밤 한 아이를 업고 강을 건너는데 갈수록 무거워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그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무거운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당신은 온 세상을 업고 있으니까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신이 찾고 있는 왕이지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이라는 책에서 로버트 엘스버그는 “일상이 아무리 지루하고 힘들어도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우리가 찾고 있는 왕을 섬기는 일이라고 믿는다면 얼마나 다르게 그 평범한 과제를 수행하겠는가?” 묻고 있다.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에서 발간한 <간추린 사회교리>에서는 ‘노동의 영성’을 선포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인간이 되시어 “지상생활의 대부분을 목수의 작업대에서 육체노동을 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가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요한 5,17)이라고 말씀하셨다. 노동이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행하는 천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계승하는 거룩한 행위라는 뜻이다.

사회교리에서는 “예수님과 일치하여 노동의 수고를 견디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 아드님의 구원활동에 협력하는 것이며, 그들이 부름 받고 있는 노동을 통하여 날마다 그분의 십자가를 자고 가는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노동은 ‘성화의 수단’이며 ‘세상사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불어 넣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먹을 양식을 얻기 위해서도 일하지만, 결국 가난한 이웃에게 마실 것과 입을 주고,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보살피며 친구가 되어 주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노동을 하고 있다.
 

[노동절]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조선노동총연맹이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을 외치며 1923년 5월 1일 서울역에서 처음으로 노동절 행사를 열었으며, 해방 이후 대한노동조합총연맹이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해 왔으나, 1959년 이승만 정권이 노동절을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로 바꾸고, 박정희 정권은 1963년 노동법을 개정하면서 ‘근로자의 날’로 이름도 바꾸었다. 그러다가 1994년에야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다시 지정했지만 ‘노동절May Day’라는 역사적인 이름은 아직 되찾지 못했다.
[노동절]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조선노동총연맹이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을 외치며 1923년 5월 1일 서울역에서 처음으로 노동절 행사를 열었으며, 해방 이후 대한노동조합총연맹이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해 왔으나, 1959년 이승만 정권이 노동절을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로 바꾸고, 박정희 정권은 1963년 노동법을 개정하면서 ‘근로자의 날’로 이름도 바꾸었다. 그러다가 1994년에야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다시 지정했지만 ‘노동절May Day’라는 역사적인 이름은 아직 되찾지 못했다.

결국 우리가 힘겹지만 기꺼이 내어놓는 노동은 “연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자비를 행하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부모형제들은 밥상을 차리고, 공장에 나가서 일한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세상에 기여한다. 특별히 가난하고 고달픈 생애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것도 내가 아직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꾼 작물과 내가 만든 물건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때로는 돈을 받고, 때로는 거저 줄 수도 있다. 노동의 결과로 주어지는 임금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자비를 베풀수 있다.

그러나 노동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하느님의 지체인 우주를 매만질 수 있다는 점이다. 농부는 농사를 지으면서 때때로 비를 내려주시고 햇볕을 비추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절감한다. 공장 노동자들은 마치 하느님께서 세상을 지으실 때처럼 물질을 변형시켜 새로운 창조를 이룬다. 요리를 하거나 마당을 쓸 때마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머무는 공간을 기쁨을 채운다. 글을 쓰면서 천사가 손끝에 내려앉는 것을 경험하고, 학교와 사무실을 은총으로 가득 채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을 하느님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성인들 가운데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부활의 로렌조' 형제는 파리의 한 수도원에 입회한 뒤로 80세에 이승을 떠날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냄비와 프라이팬 가운데 지냈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노동' 가운데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었다.

“나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부엌의 딸그락 딸그락 하는 소리 속에서, 때때로 이것저것 청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마치 성체조배 때처럼 깊은 고요 속에서 하느님을 모십니다. 우리의 성화는 우리가 하는 일을 바꾸는데 있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평범한 일들을 하느님을 위해 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일의 위대함을 보시지 않고, 얼마나 사랑을 가지고 하는가를 보기 때문입니다.”

<간추린 사회교리>는 “노동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 선이며, 노동에 참여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288항)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완전고용’은 정의와 공동선을 지향하는 모든 경제체제에서 ‘의무적인 목표’라는 게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다. 교회는 “노동권이 방해받거나 제도적으로 부인되는 사회, 노동자들에게 만족스러운 수준의 고용을 보장하지 못하는 경제정책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윤리에 합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으며, 사회적 평화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노동이 이처럼 축복받은 거룩한 행위이며, 인간이 마땅히 누릴 권리라면, 한국사회처럼 청년실업이 만성화된 사회는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행위를 계승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국가권력은 국민들에게 평온한 저녁을 선물하지 못하고 기업들의 이윤 추구에만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설령 어느 노동자가 취업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제한 없는 노동착취에 시달린다면, 이것 역시 하느님의 창조적 노동을 억압적 노동으로 뒤바꾸고, 노동자들에게 생활을 돌보는 ‘노동하는 기쁨’ 대신에 생존을 위해 ‘노역당하는 신음소리’를 강요하는 체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와 같은 통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를 ‘경제독재’라고 표현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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