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무량수전에 기대어, 천국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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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에 기대어, 천국을 생각해본다
  • 유대칠
  • 승인 2022.08.1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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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칼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찾았다. 사과나무를 지나 조금은 경사진 계단을 올라 마주한 무량수전은 고왔다. 그 유명한 배흘림기둥 역시 그 고움을 더하였다. 우리네 오랜 불교 사찰을 볼 때면 드는 생각이 있다. 이건 자연(自然) 속 하나의 인위(人爲)가 아닌 자연과 인위가 만든 또 하나의 자연이다. 물론 사람이 만들었지만, 나만의 것이라며 자랑하듯 자연을 넘어서는 웅장함을 보이진 않는다.

자연 역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자기 자신을 그곳에 새겨간다. 그래서인지 요즘 사람의 손으로 어설프게 손질하고 화려하게 새로 만든 것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오랜 시간 서서히 늙어가는 모습이 더 고울 때가 많다. 무량수전 역시 그랬다. 하늘 향해 날카로운 날을 드리우듯 드높고 너희와 나는 다르다며 소리치듯 웅장함을 자랑하는 성당이나 교회와 다른 오랜 불교 사찰의 고움이 있다.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

‘무량수전’이란 이름을 듣고 떠오른 책은 <무량수경>(無量壽經)이다. 무량수전에서 오랜 시간 우리와 만나고 있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의 또 다른 이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불국사의 아미타불과 무량수전의 무량수불은 그렇게 사실 같은 이다. 그러니 <무량수경>은 아미타불에 관한 이야기다.

아미타불은 참 대단한 분이다. 그는 임금이었다. 그가 다스리던 나라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이 깨우침을 나누고 있었다. 임금인 그 역시 세자재왕불의 깨우침을 들었다. 그리고 큰 깨우침을 얻는다. 그는 임금의 자리에서 떠나 ‘출가(出家)’했다. ‘출가’란 욕망의 세계를 떠남이다. 깨우침(法)을 품고자(藏) 출가한 비구이기에 ‘법장비구(法藏比丘)’ 혹은 ‘법장보살(法藏菩薩)’이라 부르며 우린 그를 기억한다. 그렇게 출가한 이가 바로 ‘아미타불’이 된다.

임금의 자리, 그 높고 편한 권력의 자리를 버리고 그가 선택한 삶은 ‘수행(修行)’의 삶이다. ‘수행’이란 아무도 없는 곳을 홀로 찾는 것 혹은 아무도 없는 곳을 애써 만들어 ‘참선(參禪)’이나 ‘명상(瞑想)’에 빠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건 제대로 된 ‘수행’이 아니다. 종종 자기 ‘홀로’ 마음 편해지려는 이기심의 보기 좋은 드러남이기도 하니 말이다. 결국 자기만을 위한 ‘자리(自利)’의 모습이다. 법장보살은 그리 수행하지 않았다. 그의 수행은 이타적 보살행이다. 우리가 쉽게 쓰는 보살이란 말은 사실 ‘이기(利己)’가 아닌 ‘이타(利他)’에 대한 말이다. 그리고 이타적 보살행이 부처의 나라, 불국(佛國)의 토대가 된다. 이런 보살행으로 법장보살은 아미타불로 성불하게 된다.

인도 지방 인사말이라며 ‘나마스테(Namaste)’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 말은 ‘나마스(namas)’와 ‘테(te)’로 이루어진다. ‘나마스’는 ‘절하다’란 말이고, ‘태’는 ‘너에게’란 말이다. 결국 쉽게 풀면 ‘당신에게 인사합니다’ 정도의 뜻이 되겠다. ‘나모 아미타유스(Namo Amitāyus)’ 이 말을 한자로 옮기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다. 이 한자만에서 ‘나무’는 ‘나마스테’의 ‘나마스’와 같은 뜻의 산스크리트어 ‘나모(Namo)’를 한자로 표기한 거다. ‘아미타불’은 산스크리트어로 ‘아미타유스(Amitāyus)’다. 그러니 결국 ‘나무아미타불’은 쉽게 말하면 ‘아미타불께 인사드립니다’, 다르게 풀이하면 “아미타불에게 귀의합니다”란 말이다. ‘여기에서 ‘귀의(歸依)’란 말은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무아미타불. 불자(佛子)가 아닌 나에게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불의 ‘보살행’을 따르겠다는 일종의 다짐으로 들린다. 나에게 그 보살행은 오직 나에게만 이로운 ‘자리(自利)’의 삶도 아니고, 오직 남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이타’의 삶만도 아니다. 이 둘이 하나 된 거다. ‘나’를 비우면 비울수록 ‘나’는 자유롭다. 그리고 내가 비워지면 그 자리엔 남의 아픔에 더불어 있을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나를 채우고 채우면 자신의 삶 속 아무리 작은 곳이 비어도 남과 더불어 살 수 없다. 그저 ‘나’를 더 채울 생각뿐이다. 그렇게 아집(我執) 가능한 마음은 항상 불안하다. 잃을까 불안하고, 빼앗길까 불안하고, 속을까 불안하다. 절대 ‘나’를 속이지 않는 그 무엇만을 굳게 의지하게 된다. 그건 바로 내 ‘욕심’이다. 그 ‘욕심’을 따라 헛된 것을 향해 내 온 삶을 던진다. 그렇게 던져 얻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아미타불은 본래 임금이었다. 권력도 재물도 넘치도록 가진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그 좋은 자리를 버렸다. 그 욕망의 자리를 버리고, 비울 수 있는 대로 모두를 비워 모두를 위한 보살행의 삶을 살았다. ‘더불어’의 삶을 살았다. 그 ‘더불어’의 삶은 그 자신을 위한 삶이며 동시에 모두를 위한 삶이다. 그렇게 그는 ‘아미타불’이 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리 살겠다는 다짐, 그것이 나에겐 ‘나무아미타불’의 순간이다. 그 다짐 앞에서 부끄러운 나를 마주하는 순간 역시 ‘나무아미타불’의 순간이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때마다 그 가운데 담긴 지혜를 다짐하며 살아간다면 우린 더 ‘고운 마음’이 되어 있을 거다. 그 지혜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돌아보고 돌아보는 우리라면, 우린 더 ‘고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고운 사람’이 되어 있을 거다. 어쩌면 바로 그런 마음이 모인 그곳이 부처의 나라, ‘불국’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니 바로 이런 곳이 이 땅에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부석사 무량수전 뒤, 어느 나무 아래 앉아 나를 돌아보며 나 역시 다짐해본다. ‘나무아미타불’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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