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 가난을 허락한 할아버지가 살려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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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 가난을 허락한 할아버지가 살려놓은
  • 장진희
  • 승인 2022.08.08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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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살려낸 것들 4 - 무주에서

겨울입니다. 산골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춥습니다. 콩이건 고구마건 끝물고추건 서리 오기 전에 거둘 수 있는 건 다 거두고, 호박이든 가지든 고구마줄기든 말릴 수 있는 건 다 말려서 겨울 날 준비를 합니다. 그중에서도 눈이 내려 쌓이기 전에 땔감을 마련하는 것이 일 중의 일입니다. 산에 한번 쌓인 눈은 이듬해 봄까지 안 녹기가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밭에서 무 배추가 얼기 전에 뽑아 땅에 묻을 건 묻고 김장을 시작합니다. 할머니가 도시 나간 자식들에게 보낼 것까지 몇 다라이씩 김장을 하는 동안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 집에서는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내립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가을걷이도 다 끝나고 이제 급한 일도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시나브로 나무를 져나릅니다. 그러고는 야무지게 도끼질을 해서 헛간이나 처마 밑에 차곡차곡 쟁여 놓습니다. 쟁여져 있는 장작더미를 보면 마치 벌이 벌집을 지어놓은 듯, 새가 둥지를 만들어놓은 듯, 나무가 이파리 이파리마다 무늬를 만들어놓은 듯 절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연보다 더한 예술품은 없다 합니다만, 이 정도면 예술이라 할 만합니다.

석달 열흘 눈이 와도 걱정 없겠다 싶습니다. 그 집 앞을 지나다 그렇게 쟁여져 있는 장작을 보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어 보입니다.

날이 제법 추워졌습니다. 히터가 고장 난 1톤 트럭 페달을 밟는 발이 시렵습니다. 뜬봉샘에서부터 흘러흘러온 골짜기물들이 새로 생긴 거대한 용담댐에서 강제로 집합되어 죽을 똥을 싸고 십년감수하고 나온 물들이 흘러, 이제는 그전보다 물빛이 맥이 없지만 그래도 잘생긴 산봉우리들을 만나 기운이 돌아 유려하게 흘러가는, 물줄기가 아름답기 짝이 없는 곳 무주 부남면 소재지를 지나는 참입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나무를 잔뜩 해 지게에 짊어지고 강바람 매서운 강변길을 따라 걷고 계십니다. 순간적으로 '아! 춥고 힘드시겠다. 집이 어디신지 모르겠지만 이 트럭으로 좀 실어다 드리고 오면 좋겠네.' 하는 마음부터 듭니다. 아무 대책 없는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고물차지만 나는 그래도 이놈의 트럭이 하나 있어 저 할아버지에 비해 나무 하기가 얼마나 수월하냐? 할아버지도 트럭이 한 대 있으면 좋을걸......'

'엥?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할아버지가 트럭을 운전할 수 있고, 트럭이 한 대 있다고 치자. 그것이 할아버지 인생에 정녕 도움이 되는 일이냐?'

'엥! 텍도 없다. 운전은 둘째 치고 그놈의 트럭을 고물 중고로라도 하나 사려면 저 할아버지가 그 돈을 벌기 위해 무슨 모진 일을 당할 것이냐? 그 아들이? 아들도 마찬가지지. 아들이 그 돈 벌기 위해 도시에서 고생하는 꼴 보느니 춥고 힘들더라도 뱃속 편하기는 지게가 백배 낫지.'

'그리고 트럭을 사기만 하면 뭐하냐. 기름값이며 시시때때로 들어가는 수리비며 소모품 가는 돈이며.......'

'사람들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여. 편한 것만 알고 편하기 위해 들어가는 수고, 잃는 것은 모르는 것이여. 별로 어려운 산수도 아닌데 요새 사람들 그 간단한 이치를 모르는 것이여.'

도시 사람들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끔찍하지만, 시골 사람들도 특히 젊은것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편하게 농사지으려고, 많이 지어 좀 잘 살아보려고, 자식들 도시로 유학 보내보려고(잘나갈수록 절대로 시골집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콤바인에 트랙터에 빚더미에 허덕이는 사람들, 동네마다 젊은 사람들은 다 그 모양입니다. 그나마 돈 없고 힘없어 일 저지르지 않은 노인네들이, 자식 걱정만 없으면 세상, 마음은 편한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대폿집에서 만났던 젊은 사람 얘기가 생각납니다.

"마을에 버스가 하루 댓 번밖에 안 와서, 아, 일 한 번 보러 다니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들고, 차 생기면 금방금방 다녀오고 시간도 남을 거고, 아, 그래서 무리를 해서 차를 하나 안 샀겄소? 근디 원, 차 없을 때보다 인생이 훨씬 바쁘고 정신없어져 부렀소. 별일도 아닌 걸로 종일 들락날락, 온 식구들 발노릇하랴, 할부 갚으랴, 나는 완전히 저놈의 차, 상전 모시는 종이 되어부렀단 말이오."

그날 이후 크게 느낀 바 있어 그나마 있던 트럭을 팔아 치웠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차 있을 때보다 인생이 훨씬 여유롭고 행복해졌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지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도 새삼 쳐다봐야지, 구름 모양도 헤아려봐야지, 산새 소리도 이놈 저놈 것 구별해서 들어봐야지, 좁쌀만한 들풀 꽃도 들여다봐 줘야지......

그리고 차 끌고 다닐 때는 머리에 짐 이고 다니거나 버스 시간 안 맞아서 십릿길, 시오리길 걸어다니는 할머니들 태워드리는 재미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같이 버스에 타서,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재미가 솔찮합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나 같은 영계(?)는 인기가 좋습니다. 같이 얘기만 해도 오지고 마음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시골 버스에 젊은 사람 하나라도 타면 덜 쓸쓸하고, 사람 사는 것 같아 좋으신 모양입니다.

또 뒷산으로 나무 하러 다니는 재미도 좋습니다. 바구니 하나 가득 모아두었다 빨랫줄 부족할 지경으로 한꺼번에 하던 빨래를, 세탁기 없애고부터 그때그때 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버릇처럼 조금씩조금씩 하면 될 일을 모아서, 일을 만들어서 했던 것이지요.

자전거를 빨리 달리는 것보다, 걸음보다 늦게 가기가 훨씬 어려운 것처럼, 젊은 사람이 노인네 걸음에 맞춰 십리길 가기가 정작 노인보다 훨씬 어려운 것처럼 '한꺼번에 많이'보다 '조금씩 시나브로' 사는 방식이 이제는 훨씬 어려운 시대입니다.

대의명분을 세우고 할 일이 많아진 사람들, 아주 심각하게 바빠진 사람들, 우습다고 할 것입니다. 중요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작고 하찮은 일에 신경을 쓸 것이냐고요. 그렇게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대의명분이 넘쳐납니다. 작고 사소한 것은 부족하고, 크고 거창한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나 한몸이라도, 일인분이라도 대의명분을 줄여야 세상이 덜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

창문 앞에 심은 지 오륙년쯤 된 목련나무가 서 있습니다. 묘목을 사다 심은 지 한 해, 두 해 지독히도 더디게 자라는 것 같던 나무가 어느 날 보니 당당한 존재 하나로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동안 무지하게 열심히 산 것 같은데, 그 나무를 보니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무는 세월을 살았고, 사람은 세월을 허송한 것 같아 어딘가 찌르듯 아파옵니다.

그 목련을 보면서 지게에 한 짐 가득 나무를 해오던 할아버지를 떠올립니다. 그 어느 존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고 오롯이 제 한 생명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는 존재, 그리하여 그 생명이 생명으로 이어지게 하는 일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이 없는 존재.

그 신성한 의무 이외의 모든 노력은 사실은 오히려 다른 생명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역설이 진실인 것 같습니다. 다른 생명에게 해가 된다는 것은 결국 제 존재에도 해가 되는 것이지요. 뭔가를 위해 열심히 하는 것보다, 뭔가를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어렵고 소중한, 지금이라는 시대!

지게는 '가난'을 허락하신 할아버지가 살려놓으신 것입니다.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무주에서 진도, 지금은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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