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함은 공동체의 영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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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함은 공동체의 영양소
  • 최태선
  • 승인 2022.07.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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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오래 전 공동체에서 목격한 사실이다. 공동체의 두 사람이 각별하게 친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챙겨주었다. 맛있는 반찬을 챙겨주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무도 모르는 감추어진 힘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기도 제목으로 내놓기도 했고, 당연한 것이지만 공동체의 일도 꼭 둘이 함께 하려 했고 둘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지려 했다.

그것이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둘의 모습에서 소외감을 느껴야 했고, 실제로 그들 둘이 하는 행동은 탁월했고 부각되었다.

그곳의 목사님은 그런 둘의 행동을 못마땅해 했다. 그 둘이 문제라는 말도 그 둘이 없는 곳에서 자주 하셨다. 결국 그 두 사람은 공동체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공동체를 떠나게 되었다.

공동체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가 되느냐, 결속력을 더해주는 바람직한 일이 되느냐는 공동체가 가진 특징에 의해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곳의 목사님은 그것을 문제로 파악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동체에는 오히려 그러한 친밀함이 더더욱 필요하다. 문제는 그 두 사람이 서로를 챙기고 이익을 얻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친밀한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 두 사람의 문제는 이기심이었다. 두 사람이 친밀하면 친밀할수록 서로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둘이 힘을 합쳐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이 되어야 했다.

결국 두 사람의 친밀함이 문제가 된 것은 두 사람의 개인적인 성숙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머물렀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결과적으로 타인을 위한 삶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타인을 위한 삶이 반사적인 행동이 된 사람은 친밀함에서 자유로워진다. 어떤 사람과 친밀해질수록 그 사람은 자신과 동일시되고 그렇게 되면 서로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힘을 합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일이 관심사가 될 수 밖에 없다.

 

사진출처=es.churchpop.com
사진출처=es.churchpop.com

그렇다면 문제는 분명해진다. 공동체 안에서 개인 간의 친밀함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간의 친밀함이 이기적으로 드러나는 두 사람의 영적 성숙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면 영적 성숙은 개인적인 친밀함을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나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을 통해 수녀원의 삶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었다. 수녀원에서는 개인적인 친밀함을 금지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자발적인 동의가 아니라 타율에 의한, 다시 말해 폭력적인 억압이다. 카렌 암스트롱은 수녀원을 탈퇴한 후에 그것에 대해 언급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개인적인 감정도 억제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개인적인 감정 역시 이기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뿐이다.

친밀감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공동체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친밀감이란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며 감정 역시 영적인 삶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개인적인 친밀함을 금지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친밀함이야말로 삼위일체의 가장 큰 특징이며 그 친밀함에서 비로소 사랑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적인 관계로 추상화시키거나 경외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 개인의 관계 역시 하느님의 존재방식인 삼위일체가 지향점으로 작동되어야 한다. 다르지만 분리되지 않는 그 관계는 완전한 친밀함이다. 삼위가 친밀할수록 삼위는 하나가 되고 삼위를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게 한다.

친밀함 역시 산상수훈과 마찬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산상수훈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나는 바로 이 말씀에 친밀함에 관한 목표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삼위가 분명하게 다르게 존재한다. 그러나 친밀함으로 인해 셋은 구분되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하나가 된다. 만일 삼위에 이 친밀함이 사라진다면 삼위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다. 공동체 안에 모든 개인들은 각자 인격체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하나가 된다. 그런 개인들 간의 친밀함은 금지될 수 없다. 그들의 친밀함이 하나로 연결되어 삼위 하느님처럼 될 때 공동체는 완성된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공동체가 목표로 지항점으로 존재해야 한다. 공동체는 영원히 그 하나 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하나 됨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그 하나 됨을 향함으로써 공동체는 하나 됨에 수렴할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완전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인간이 아버지처럼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주님은 제자들에게 완전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에서 사라진 것은 바로 이 친밀함이다. 친밀하면 친밀할수록 교회는 타인을 위한 곳이 된다.

잘 보라. 오늘날 교회들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오죽하면 교인들이 다른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이 부부가 다른 남자와 여자와 자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하는가. 그들에게는 하느님도 그리스도도 없다. 어디 목사뿐인가. 오늘날 교회들은 자기 교회가 다른 교회들에 비해 좋은 교회라는 자랑을 한다. 심지어 자기 교회가 커지는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자기 교회가 다른 교회에 비해 커지는 것은 경쟁하는 것이며 싸우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라면 교회는 자기 교회만 커지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우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불균형을 이루거나 암세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자연스러워진 것은 교회가 더 이상 친밀함을 간직할 수 없는 이기적인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친밀함이 공동체를 깨뜨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친밀함은 결코 금지되거나 금기시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허무는 폭력이며 첩경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수녀들의 폭력적인 모습이 묘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정확한 원인은 수녀(도)원이 친밀함을 금하는 폭력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밭을 보라. 그들은 어울려 하나의 장관을 연출한다. 꽃들이 친밀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모두가 자기의 꽃을 피우는 곳이다. 친밀함은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필수적인 공동체의 영양소이다.

그렇다. 친밀함이야말로 복음의 꽃을 피워내는 필수적인 영양소이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친밀함이 모든 악의와 적대감을 소멸시킨다. 하느님 나라 공동체는 친밀함으로 하나가 되는 곳이다. 친밀할수록 사랑이 완성되어 가고 친밀할수록 이기심이 발붙일 곳이 없어지는 곳이다. 억압이라는 부자연스러운 폭력이 사라지고 자발적 동의에 의해 섬김과 희생이 꽃으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그곳은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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