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지막 심판의 증인이 되어 주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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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지막 심판의 증인이 되어 주실 분
  • 최태선
  • 승인 2022.07.1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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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이사 온 후 어제 처음 첫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필요한 것들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간신히 그렇게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경매로 우리 집에서 쫓겨날 때 가지고 나온 물건들 중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는 걸 확인해야 했습니다. 모두가 필요해 보였던 것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새 것인 채로 영롱하게 빛나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십 년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그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물건들이 삐죽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이들의 정체가 바로 저의 탐욕입니다. 그리고 그 물건들은 교부들의 설교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의 것을 도둑질한 것들입니다. 이제는 그 물건들이 아무리 새것이고 용도가 폐기되지 않았다 해도 버리거나, 돈을 주고 폐기처분해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제 마음속의 탐욕도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견물생심인지라 그 일이 만만치는 않을 것입니다. 새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영적인 기도인가를 실감합니다. 이 기도에도 영원한 긴장감이 계속됩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풍성하게 공급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풍성한 것들을 받아 끊임없이 나누어 그것들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상태로 살아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 것을 다 비워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일 것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이번 이사를 할 때 고마운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을 저는 길에서 만났습니다. 가파른 골목길에서 그분은 폐지를 줍고 계셨습니다. 체격도 작은 그분이 박스를 줍는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다가가 모아둔 캔들이 있는데 가져가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따라 저의 집까지 오셨습니다. 제가 올라가 캔들을 가지고 내려와 드렸고 식사나 한 끼 하시라고 돈을 드렸습니다. 그분은 돈까지 주신다고 연신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만남을 위해 그분의 전화번호를 저장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을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그분을 만날 때면 쌀도 준비하고 돈도 준비했습니다. 오만 원짜리를 드렸을 때는 정말 몸 둘 바를 몰라 하셨습니다. 그런 일들이 몇 번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그분은 황송해 하셨습니다.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말씀을 듣더니 음료라도 사오시겠다고 몇 번을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짐을 줄이고 있는 중이니 절대 그러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습니다. 버려야 할 물건들 가운데 책이나 옷이나 신발과 같이 그분이 좋아하시는 물건들을 따로 모아 전화를 드리고 가져가시라고 했습니다. 그 분량이 엄청났습니다. 연신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번은 다른 분이 그분을 위해 내다 놓은 물건들을 가져가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팔 수 있는 것들을 다 모아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받은 은혜를 갚으시겠다면 돈을 주고 버려야 하는 것들을 내다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들은 그런 물건들을 따로 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물건을 버려주시면 그 물건들을 버릴 때 내야 하는 돈을 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폐지를 모으는 것보다 더 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물건들을 버려주셨습니다.

이사가 전 날 마지막으로 그렇게 버려야 할 물건들을 내놓고 그분을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수고비를 예쁜 봉투에 담고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주님이 생각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을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그분이 못 온다는 전화를 하셨습니다. 재차 약속을 하였지만 너무 바빠서 올 수 없다는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을 만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것들을 부탁드린 상태에서 이사를 마쳤습니다.

제 자랑 같지만 그분과의 통화 중에 정신이 번쩍 드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연신 제게 너무 큰 은혜를 입었다 하시면서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한 분도 없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외로움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저는 별 말씀을 다하신다고 했고 제가 오히려 고맙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사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물건들까지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수거를 부탁드렸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사 후 전화를 하니 그분이 전화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전화를 드리면 얼마 후에 다시 전화가 왔는데 그후론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갑자기 그분이 천사였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분이 제 수호천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 심판의 증인들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오 복음 25장에 있는 마지막 심판의 비유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심판 판정의 결정적인 증인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열심히 도왔던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전인수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그분에게서 들었던 그 말씀이 주님이 하신 말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전 저에 대한 악의적인 글을 쓴 사람은 노숙자들에게 푼돈을 주고 생색을 낸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심판의 근거는 위대한 일이 아니라 그렇게 작은 우리의 일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반사행동들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목사가 되었지만 가시적으로 큰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소소하게 언급할 재목조차 되지 않는 일들만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 예수의 이름으로 한 일 자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것들을 구분해내시고 그것을 인정해주시기 위해 노심초사하십니다. 세상의 관심거리도 되지 못하는 일에서도 그분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가 한 작은 일 하나, 아니 우리의 의도까지도 살피시고 그것을 기꺼이 인정해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을 흠숭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참 유머러스하신 분이시며 언제나 제 생각 이상으로 자상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안 계시다면 제 믿음은 물론 저의 삶 자체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의심 없이 기꺼이 작은 자가 되는 것이 제 신앙의 목표입니다. 어제는 맨바보라는 제목의 글을 썼지만 맨바보조차도 무언가 커지려는 제 마음의 투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맨바보도 아닌 무명의 작은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신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계속해서 폐지를 줍는 그 어르신께 전화를 드려볼 것입니다. 이사를 했으니 지난번에 사오겠다고 하신 음료수를 사오시라고 할 것입니다. 제가 준비했던 선물과 봉투도 드리고 진도를 좀 더 나갈 계획입니다. 주님이 그런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에는 증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분들이 바로 우리의 마지막 심판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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