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딕스, 우리들의 형제인 민중 예수를 그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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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딕스, 우리들의 형제인 민중 예수를 그린 화가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7.1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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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딕스(Wilhelm Heinrich Otto Dix, 1891-1969)는 1891년 12월 독일 운터하우스에서 태어났으며, 철주조 노동자인 프란츠 딕스와 재봉사이자 아마추어 예술가였던 루이스 딕스의 장남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에 시를 썼다. 오토의 사촌 프리츠 아만(Fritz Amann)은 초상화 작가여서, 오토 딕스는 일찍 예술계와 접촉할 수 있었다.

15세의 나이에 오토 딕스는 조경 화가 칼 센프와 함께 4년간 견습을 시작했고, 센프의 작업장에서 딕스는 첫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1910년 견습기를 마치자 드레스덴 예술공예학교에 입학했으며, 초상화를 그려 지역 주민들에게 판매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공예학교에서 오토 딕스는 리처드 구어(Richard Guhr)에게 배웠는데,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딕스는 그리처드 구어의 비유적이고 장식적인 회화 수업에 참석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오토 딕스는 독일군에 열정적으로 등록했다. 이 전쟁에서 오토 딕스는 드레스덴에 주둔한 필드 포병연대에 장교로 합류했다. 1915년 가을, 그는 서부 전선의 기관총 부대 비위임 장교로 임명되어 솜 전투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1917년, 그의 부대는 동부 전선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러시아와 맞서 싸웠다. 이어 서부 전선에 합루한 그의 연대는 독일의 봄 공세에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 인정받아 철십자가 훈장을 받고 부사관으로 진급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4년 동안 오토 딕스는 다섯 차례나 부상을 입었으며, 전쟁의 끔찍한 광경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런 적대행위가 낳은 악몽에 시달렸다. 그래서 1924년에 출판된 50개의 에칭 포트폴리오를 포함하여 그의 작품 가운데는 전쟁의 악몽과 그의 충격적인 경험이 반영되었다.

 

오토 딕스, 퇴폐예술가로 낙인 찍히다

오토 딕스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1919년에 드레스덴 아트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그 도시에서 예술을 공부하면서 표현주의 화가 콘레 펠릭스 뮐러를 만났다. 펠릭스 뮐러는 독일 공산당 의원으로 활동하였는데, 그래서 그의 그림은 종종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펠릭스 뮐러는 오토 딕스의 멘토가 되었고, 딕스와 같은 생각을 가진 표현주의 예술가들을 모아 도시의 가장 급진적인 예술 그룹인 ‘드레스덴 탈퇴주의자 그룹’을 결성했다.

1922년 오토 딕스는 드레스덴에서 뒤셀도르프로 이사하여 그의 예술 작품에 대한 수익성 있는 시장을 찾았다. 퀼른 시에서 의뢰한 <참호>라는 그림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하룻밤 전투를 치르면서 참호 속에서 죽어간 군인들의 절단된 시체를 묘사하여 스캔들이 되었다. 이 작품을 의뢰한 쾰른의 왈라프-리차츠 박물관은 오토 딕스의 그림을 커튼 뒤에 숨겨야 한다는 소란이 일었다. 결국 당시 쾰른 시장이었으며 미래의 독일 총리가 될 콘라드 아데나우어는 시의 작품 구매를 취소했고, 박물관 책임자인 한스 세커(Hans Secker)는 해고당했다.

오토 딕스는 친구였던 조지 그로스처럼 현재의 독일 바이마르 사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의 그림은 삶의 더 비참한 측면과 전쟁에서 패배한 뒤에 독일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절망감에 주목하였다. 오토 딕스의 그림은 매춘과 폭력, 노령과 죽음을 그래픽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베를린 거리를 묘사하면서, 육체적으로 훼손되고 정신적으로 절망에 빠져 있는 참전했던 상이군인들을 그렸다. 이들은 나라를 위해 봉사했지만, 사실상 사회적으로 버려지고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오토 딕스의 그림은 다소 슬프고 우울하면서도 현실적이었다.

 

1930년대에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자, 오토 딕스와 같은 예술가들은 퇴폐예술가로 여겨졌다. 패배한 독일군을 묘사하거나 우울한 베를린 거리를 그린다는 것은 애국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오토 딕스는 드레스덴 아카데미 미술 교사 직책에서 해고당했다. 한편 나치는 1937년 뮌헨에서 엔타테 쿤스트 또는 퇴폐 예술이라는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의 목적은 최고의 종족인 독일인에게 걸맞지 않는 혐오스런 예술품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예술이 퇴화되었다고 비난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치는 이런 예술을 유대인이나 할 법한 ‘볼세비키(공산주의) 예술’이라고 불렀다. 당시 나치는 200여 명의 예술가에게 2만 점이 넘는 작품들을 압수하였다. 작품들은 불에 타고, 오토 딕스 등 예술가들은 나치가 통제하는 제국 미술실에 합류하여 일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풍경화만 그리라고 강요받았다.

하지만 오토 딕스는 은밀히 나치의 이상을 비판하는 우화적인 그림을 그렸다. 1939년 그는 히틀러 암살과 연루된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나중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945년 53세의 나이로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1946년 2월에 석방되었다. 드레스덴으로 다시 돌아온 오토 딕스는 말년에 전쟁이 낳은 고통과 종교적 갈망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다 1969년 독일 싱겐에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전쟁에 대한 통렬한 비판: 딕스의 제단화

사회비판적 그림을 그리던 오토 딕스는 뒤셀도르프에서 가르칠 때 <포주와 여자들>, <자본주의의 두 희생물>, <기괴한 매춘부와 추한 퇴직군인이 희생물이다>와 같은 회화와 드로잉을 남겼다. 1924년에는 전쟁의 공포를 50여 점의 에칭으로 묘사한 <전쟁>을 그렸다. 특별히 오토 딕스의 <전쟁제단화>는 가로 폭이 4미터가 넘고 높이는 2.5미터나 되는 대작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최전방에서 전쟁을 경험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나치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인 1929년~32년 사이에 이 대작을 완성하였다.

 

‘전쟁제단화’라는 이름은 중세시대 교회의 제단에 세워지던 성화 양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장 유명한 제단화는 그륀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같은 것이 있다. 이 성화양식은 위쪽 중앙에 메인 그림이 놓이고 양쪽에 서브 그림이 놓이게 되는데 이것을 트립티크(Tryptique)라 부른다. 그 아래에 가로로 길게 놓이는 화면을 프레델라(Predella)라고 한다.

오토 딕스는 말한다.

“1928년이었다. 나는 이 거대한 주제를 다룰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완성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바이마르 공화국이던 당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영웅화 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낳았는지 사람들은 이미 잊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 폭 제단화가 태어났다. 화가가 전쟁의 참상을 그리면서 종교화에서 주로 쓰이던 구성을 활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가 목숨을 버린 것은 인류를 위해서라지만 군인들은 무엇을 위해 전쟁에서 쓰러져간 것일까?”

왼쪽 패널에는 짙은 안개 속에서 군인들이 무장을 한 채 대열을 이루며 전투로 향하고 있다. 이 장면은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묘사된 장면의 오마주다. ‘그들은 기둥을 이루고 있다. 기둥은 똑바로 앞으로 나아간다. 실루엣은 뒤섞이고 그들 전체는 하나의 공간을 이룬다. 더 이상 개인은 알아볼 수 없고 그들은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어두운 공간에 불과하다. 그 공간에 짙은 안개에서 헤매면서 나오는 듯한 머리와 소총들이 기이하게 덧붙여진다.’ 두 군인은 바짝 붙어 서서 서로의 불안감과 공포를 달래는 듯이 보인다. 뒷모습의 그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 나와서 지옥과 같은 곳으로 무겁게 나아간다. 그들을 따라 관객은 그림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중앙 패널의 전경은 온통 죽은 병사들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내장으로 뒤덮여 있다. 폐허의 풍경 한쪽에 방독면을 쓴 군인이 참혹한 죽음의 현장을 바라본다. 방독면은 전쟁을 환기하면서 참전한 모든 이름 없는 군인을 나타낸다. 열 지어 늘어선 헐벗은 나무들은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를 연상시킨다. 앞쪽으로 뻗은 손은 예수의 못 박힌 손처럼 피로 흥건하다. 팔꿈치 부분에는 가시관도 보인다. 거꾸로 고꾸라진 채 양다리가 들린 병사의 온 몸에 난 구멍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른다. 오른쪽 패널에는 붉은 불길이 치솟는 지옥에서 겨우 살아나온 것 같은 군인이 있다. 군복도 군모도 없이 부상당한 동료를 부축한 채 유령처럼 전장에서 빠져나오는 길이다. 그것은 딕스의 자화상이다. 전쟁에서 본 모든 것을 증언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하단부 그림에는 죽어서야 안식을 얻은 군인들의 시체가 누워있다.

 

 

예수의 고난은 연극 아니라 실제였다

오토 딕스는 어린 시절부터 성경의 이야기들을 실제적으로 느꼈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마음에 지니고 있을 때, 나는 항상 그런 일들이 우리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생각했다. 나는 정확하게 숲속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는 약간의 언덕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가 야곱이 누워 있었던 곳이고, 그래서 야곱의 사다리가 바로 내 앞에 있었다. 그리고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 의해 버려진 그 우물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반시간 정도 떨어진 강은 갈대와 동심초로 뒤덮여 있었는데, 바로 그곳이 이집트 공주가 작은 바구니에 든 모세를 건져낸 곳이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니체의 정신세계를 흠모한 딕스는 크면서 오랫동안 교회를 멀리했다. 그는 친구에게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를 따르라’는 엄청난 예수의 요구에 나는 따를 수 없었고, 그때는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오토 딕스는 예수를 그려내면서 이렇게 전했다.

“예수의 생애는 정말 불쌍하고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몇 명의 제자를 거느린 한 가난한 남자가 로마 귀족들, 건방진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들에게 의심받고, 경멸과 조롱을 당했다. 그런데 지금 (교회)사람들은 그분을 사기꾼으로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말끔하고 우아한 이미지로 예수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분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가난에 찌들고 못생기고 비난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교회가 보여주는 예수는 무용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잘 생기고 친절하고 멋있고, 아주 건장한 예수의 모습이다. 하지만 십자가형은 끔찍한 형벌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기적적인 부활을 위대한 사건으로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의 예수상도 우아하게 만들었다. 이런 건 다 속임수다. 예수의 죽음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 성직자들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마치 잘 짜인 연극처럼 연출한다. 하지만 예수의 고통은 전쟁보다 참혹했다. 그분은 혼자서 이 모든 걸 겪어야 했다.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 모두들 그를 버렸다. 그러니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한 인간의 고독에 대한 숭고한 이야기이다.”

오토 딕스에게 복음서에서 전달하는 사건은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로 나타난다. 1912년경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화 <피에타>에서 벌거벗은 채 수염 난 그리스도는 무릎을 꿇고 넘어져 있다.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양팔로 손을 감싸고 있는 어머니, 그녀는 그리스도의 쳐진 머리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열려진 상처와 채찍으로 생긴 핏자국이 인간의 육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은 오토 딕스의 창작에서 가장 중요하다. 1948년, 그는 <그리스도를 능욕하는 장면>, <태형>과 두 점의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를 그리고, 1949년에는 또 다른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를 그렸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피범벅이 되어 자신을 조이는 말뚝에 눌린 채로 성전경비대와 군병에게 채찍질 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각기 다른 이 수난의 광경들은 먼저 파스텔화로 그린 후 유화로 제작하였다. 1948년의 <대십자가형>이란 작품은 기념비적인데, 십자가에 매달린 인물이 화면을 온통 차지하고, 나무 형틀과 거기 달린 육체가 화면 구성의 중심을 자르고 있다. 머리는 로마 조각상과 비슷한데, 크게 뜬눈의 열린 동공은 공포에 가득한 채 관중에게 고정되어 있다. 십자가 아래에는 마리아와 요한만이 왼쪽에 있고, 한 로마 군병이 오른쪽에서 예수를 위해 울고 있다. 그리고 아주 커다란 천사가 그리스도의 상처 난 양쪽 손에서 흐르는 피를 받고 있다.

 

복음서 이야기는 나와 세계에 대한 은유

오토 딕스의 석판화 가운데 돋보이는 작품을 꼽는다면 <세례 받는 예수>일 것이고, 그밖에 <예수의 시험>, 시리즈 작품인 <베드로의 소명>, <갈릴래아 바다의 어부>와 <산상설교> 등이다. 산상설교에서 딕스는 삼각형의 구성으로 표현된 축복 받은 군중들 속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를 재현했다. 한편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는 젊고 수염이 없는데 제자들 틈에서 빵을 떼고 있고, 배반자 유다는 거의 식탁 밑으로 숨어서 불타는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오토 딕스는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리스도적 요소는 아틀리에 안에서 떠올리는 어떤 아이디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내 자신의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내 생애는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돌아온 탕자, 베드로와 닭 울음소리, 이런 모든 것은 복음서의 주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에 내가 흥미를 느꼈기에 그린 것이 아니라, 나는 그런 주제들이 내가 경험했던 세계에 대한 은유이며, 인류의 비참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이 나를 앞으로 나가도록 떠밀었다. 그리고 나를 끌어당긴 것이 또 있었는데, 그것은 진부한 주제 속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해 보려는, 끊임없이 새롭게 변해 가는 그리스도교와 같이 미술도 새롭게 해 보려는 나의 생각이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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