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성체에는 상처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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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성체에는 상처가 가득하다
  • 윤영석 신부
  • 승인 2016.08.0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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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용길

[윤영석 신부 칼럼]  

Vulnerability. 이 단어를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며칠 전 같이 신학을 공부한 친구가 이 단어를 번역할 만한 한국어가 없다고 했다. 나도 예전에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 지 고민을 했던 적이 있다. 긴 설명 없이 입에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번역하기 힘든 만큼 이해하기도 힘든 걸까?

영한사전을 보면 한 측면만 보여준다. 사전은 “상처[비난]받기 쉬움, 공격당하기 쉬움, 약점이 있음, 취약점, 허점” 등으로 정의한다. 어떤 사전에선 한발 더 나아가 “신체적, 정서적으로 상처받기 쉬움을 나타냄”이란 해석을 붙인다. 사전에 번역된 정의만 보면 vulnerability는 결코 가져서는 안 되는 요소다. 이 혹독한 사회에서 누가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상처받기 쉽고, 공격당하기 쉬운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싶겠는가?

Vulnerability,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

Vulnerability는 상처란 뜻의 라틴어 vulnus와 능력을 의미하는 접미사 -ability가 붙은 합성어다. 내 나름대로 영한사전이 말하고 있지 않는 정의를 덧붙이자면, 이는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과 ‘상처받기 쉬움’은 다르다. 둘은 다른 ‘상태’(state)에 있다.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서 우리는 위험과 불안에 노출되어 있다. 세상과 타인은 적이 되기 십상이고 자기 방어적이다. 그래서 상처받지 않고 상처를 감추려 돈, 권력, 학벌이란 옷을 겹겹이 입는다.

반면, 상처받을 수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언제든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자기 인식과 상처를 막을 수 없는 존재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발견한다. 또한 이 상태에서 숨기고 싶은 상처를 드러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나온다. 바울로 성인의 고백 또한 여기서 나오지 않았을까? “내가 구태여 자랑을 해야 한다면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공동번역, 2고린 11,30)

상처받을 수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마주한다. 생마리뒤몽 수도원의 앙드레 루프 아빠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같은 순간에 하느님의 능력을 느낀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분은 언제나 타인으로 계시면서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까운 것보다 더욱 우리와 가까이 계시다.” (<사랑의 학교: 시토회가 걷는 길>, 앙드레 루프, 55쪽)

"괜찮다"고요.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있는데

병원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와 상처받을 수 있는 상태가 공존하는 곳이다. 몸이 아프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몰아낸다. 이미 우리는 병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고 상처받기 쉬운 처지에 놓인다. 병원 사목을 하는 내가 새로 입원한 환자를 만날 때 흔히 경험하는 게 있다. 내 소개를 먼저 하고 상대에게 안부를 물어보면 대부분 “괜찮다”고 대답한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대답일 수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몸이 안 좋아서, 상처를 입고 상처에 노출된 상태에 있는데 정말 괜찮은 걸까? 아마도 내 존재가 환자 본인이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있음을 드러내서 불편한 건 아닐까?

우리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나 수구언론은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한다. 이는 곧 우리 사회가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있음을 반증한다. 상처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소리는 이내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현실을 부정한 아우성에 묻힌다. 미국의 상황을 보자. 트럼프의 출현과 인기는 상처받기 두려워 안달하는 미국 사회가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진=김용길

상처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교회

그렇다면 교회는 괜찮은가? 절대 그렇지 않다. 상처받은 상태에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최근 지인이 SNS에 성범죄로 물의를 일으킨 목사의 기사 제목을 주목했는데, 성범죄가 “여제자 스캔들”로 ‘괜찮아’졌다. 상처받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른 피해자의 고통보다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몰린 목사의 안위가 더 중요했나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이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서 ‘상처받을 수 있는 상태’로 흘러야 썩지 않는다. 미사는 하느님 당신이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들어와 상처받을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가심을 보여주는 신비다.

전례학자 에이단 카바나(Aidan Kavanagh)는 “전례는 우리를 명쾌함의 직전으로 이끄는 게 아니라 혼돈의 가장자리로 이끌고, 애매모호함의 폐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어둡고 감춰진 것들을 다룬다.”고 했다.(Aidan Kavanagh, Elements of Rite, p. 102)

상처 받기 쉬운 상태로 오시는 하느님, 예수

예수를 통해 하느님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친히 오신다. 그리고 상처 받고 죽는다. 부활 후 그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예수의 아문 상처는 우리 자신을 상처받을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우리가 받아먹는 예수의 성체에는 상처가 가득하다. 이 상처를 볼 수 있는 눈은 타인의 상처를 볼 수 있다.

Vulnerability. 한 단어로 번역하고 싶은 욕망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중국어로 누동(漏洞)이라는 단어가 vulnerability로 번역된다. “새다, 틈이 나다”라는 뜻의 누(漏)와 “골, 골짜기, 마을, 동네”라는 뜻의 동(洞)이다. ‘틈새'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골짜기의 틈’으로 볼 수 있을까? 누동, 우리의 상처 난 마음 골짜기 틈으로 상처 입으신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분이 오시기 편하시도록 매순간 그 틈을 넓혀놓는 것은 어떠할런지.


윤영석 바울로 신부
미국성공회 뉴왁교구 소속 & NewYork-Presbyterian Hospital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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