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은 밤, 별 볼 일 없는 섭섭한 밤이 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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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은 밤, 별 볼 일 없는 섭섭한 밤이 지나면
  • 한상봉
  • 승인 2022.07.03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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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잔나비 찐팬인 아내 덕분에 듣게 된 노래가 있어요. 제목은 <나의 기쁨 나의 노래>이지만 약간 쓸쓸하고 가슴을 툭툭 건드리는 아픔이 느껴집니다. 최정훈, 참 곱게 생겼지만 이 가사를 지으면서 많이 아팠었구나, 생각합니다. 내 마음처럼 닿을 수 없는 사랑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를 최정훈은 “버려지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섭섭한 밤도 있어요
오늘도 그런 밤이었죠
창을 열고 세상 모든 슬픔들에게
손짓을 하던 밤
노래가 되고 시가 될 수 있을 만큼
그만큼만 내게 오길

하지만 상처가 무늬가 될 만큼만, 노래가 되고 시가 될 만큼만 슬픔이 내게 오길 기대하는 마음을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하였지만, 그를 사랑하던 몇몇은 죽음을 지켜보았지요. 마리아 막달레나는 안식일이 끝나자 동이 트기도 전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분을 그냥 보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마음을 아시는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고 맨 먼저 이름을 불러주었던 이가 마리아 막달레나였다고 전합니다. 그이의 마음이 예수님의 상처를 무늬로 남게 하고, 예수님의 고통을 시와 노래로 만들게 했습니다.

창을 열고 세상의 모든 슬픔들을 초대하는 것은, 그 슬픔 안에서야 진실을 보기 때문일 겁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타인에 대한 기대를 접는 과정이라고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이란 기대 없이 사랑을 계속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겠지요. 예전에 윤영수의 소설 <사랑하라, 희망없이>에 열광했던 적이 있습니다. 시몬 베유는 하느님 없는 세계, 사랑 없는 세계에서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을 때 그분을 만난다고 했지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인 조희선은 “우리는 그래서 사랑하지만, 그분은 그럼에도 사랑한다.”고 했고요. 중력/관성에 눌러 살다가도 은총/기쁨으로 해방되는 순간에는, 그래요, 뭔가 도움닫기 할 누군가 필요할 겁니다. 나를 딛고 오르라며 발판이 되어줄 사람, 끝내 사랑을 접지 않은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야 “거리를 헤집으며 텅빈 눈과 헛된 맘과 또다시 싸워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비가 내렸습니다. 가뭄에 단비란 이런 거지요. 최근에 어느 성당에 취직했는데, 통상적인 일은 본당사무실 직원들이 퇴근한 저녁시간에 성당 안팎을 돌보는 일입니다. 30분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합니다. 오르막에선 다리가 뻐근하고 내리막에선 세상 편합니다. 세상살이를 몸으로 느끼는 거지요. 밤부터 비가 오면서 퇴근할 때는 빗줄기가 더 거세졌습니다. 자전거로 집에 가긴 무리였고, 콜택시를 불렀는데, 당장은 배차될만한 차량이 없다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타야 했습니다. 처음엔 이마에서 비를 쓸어내리다가, 나중엔 세상 다 그런 거야, 하며 빗속의 질주를 즐겼습니다. 어둔 밤이라 다행이고, 행인이 없어 고마운 밤이었습니다.

그날 밤 퇴근을 준비하며, 성당 구석구석을 돌아보았습니다. 사제관이 있는 5층부터 4층 성가대석, 3층 대성전, 2층 교리실을 살핍니다. 창문이 열려 있으면 닫아야 하고, 다들 이상이 없는지 살핍니다. 감실 불이 빨갛게 빛나는 성전 뒷좌석에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적막하고 적막합니다. 성호를 긋고 성전을 빠져 나오면서, 그때야 혼잣말로 그분께 하고 싶었던 말을 푸념처럼 중얼거립니다. ‘나름 착하게 사는데, 저 좀 잘 봐주시지...’ 갑자기 소설 <돈 까밀로와 빼뽀네>의 유쾌한 신부가 떠오릅니다. 일도 많고 탈도 많지만 늘 그분과 친구처럼 말을 섞는 사제 말입니다. 성당 마당에선, 빗물이 흥건한 주차장 바닥을 괜히 카메라에 담고, 통에 1,000원 넣고 양초를 사서 성모님께 바쳤습니다. 간절한 무엇이 있다면 어머니께 청해야겠죠.

잔나비의 노래는 “뒤척이다 잠 못 들던 밤이 있는 한 닿을 수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삐걱이는 잠자리가 나는 좋다.”고 하더군요. 사는 게 죄라고 믿는 사람들 앞에서 세상 고민 없는 사람이 설교한다면 누가 듣겠습니까? 그러니 삶이 고단한 것은 때로 축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말씀하신 거겠죠.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격려하고, 비 맞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어주고, 아픈 이를 위해 기도하고, 배고픈 이에게 밥 한 끼 사주는 것은, 기꺼이 기분 좋게 그렇게 하는 것은 ‘삶이 요구하는 절박함’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까닭입니다.

그러다 불쑥 치미는 시를 만났습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12시간 만에 신발을 벗으며 불쑥 내 이름 하나를 지었다. 부서진 마음은 살아있다. 부서진 마음은 살아있다.”라고 했던 엄문희 선생님이 쓰신 시였습니다. 2021년 12월 6일 야심한 밤에 쓰신 모양인데, 상당고정게시글 등록으로 이제 저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타인의 시를 만났을 때, 하느님의 얼굴을 얼핏 스쳐보았을 때 느낌이 이럴 겁니다. 위로가 되고 아프지만 따뜻한 희망이 일어납니다. 시의 제목이 없어서 더 특별한 느낌입니다.

혼자 남은 밤과 마주친 다음에야
사람은 자기 목소리로 시를 듣는다
그런 밤이면 숲에서 죽은 고래의 뼈가
문 쪽으로 힘껏 불빛을 내었다
업신여길 멸(蔑) 자를 가득 써놓고
마음을 풀지 않던 새벽은 떠났다
손에 쥔 모래알의 허무를 예감하고도
코를 팽 풀며 나를 믿던 아침이 있었다
기력 잃은 기억에 질문하던 나
기어이 울먹이던 당신이 있었다
기억이 기억나지 않는 날이 되고서야
기억은 너덜너덜 바다에 닿는다
그날이 되어서야 나는 시를 믿는다
내 목소리로 내 목소리를 듣는다

달빛에 걸린 흰 사슴의 뼈를 만난다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22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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