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명료화를 위한 일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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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명료화를 위한 일꾼학교
  • 도로시 데이
  • 승인 2016.08.08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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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환대의 집을 위하여-1

“부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환대의 집들이 필요합니다”라고 피터는 말하였다. 우리들의 첫 번째 환대의 집은 바야흐로 아기를 해산할 상황에 있었으며 실직한 방직 노동자인 한 젊은 여자가 부엌일을 맡았는데 그녀는 이미 떠돌이 신세가 된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바빴다. 그 일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모두가 교대로 하게 되었다.

피터는 갈등을 환영하였다

정원은 커피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는 훌륭한 장소가 되었다. 젊은이들이 그곳에 떼 지어 모여 들었으며, 자신들의 사회적 이상을 실천하려고 여념이 없었다. 대학생들은 종종 일하는 것보다는 토론과 논쟁을 하는 것을 더 좋아했으며 사색가와 노동자 사이의 오랜 전쟁이 즉시 터져나오곤 했다. 피터는 갈등을 환영하였다. “그것은 사고를 명료하게 해준다”라고 행복스럽게 말했다.

어느 날 가톨릭 대학의 한 철학 교수가 잠깐 들렀다. 그는 “전쟁과 그리스도교 윤리”에 관하여 하루 종일 강의를 하였다. 우리가 정원에서 그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에도 사람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에서도 대화는 계속 되었다. 또 한번은 러시아인 의사와 독일인 베네딕도 수도회 사제 그리고 한 멕시코인 장성이 자신들의 억양으로 각각의 특별한 의견을 주장하면서 그 정원에서 모두가 한꺼번에 이야기하고 있었다.

러시아 사람은 신정 통치를 옹호하였으며, 독일인 사제는 “영혼들의 희생”에 대하여 말했고 당시 계속되고 있던 박해 때문에 열을 받고 있었던 멕시코인은 반(反)혁명을 위해서 우리가 무기를 모으는데 돕기를 원하였다. 사고의 명료화에 관심이 있던 피터는 공동 농장에 대하여 프랑스어식 억양으로 말하였다.

가을 즈음에 미국 전 지역에서 날아오는 편지들은 <가톨릭일꾼> 신문이 성공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피터는 너무나 이 편지들에 현혹되어 사고의 명료화를 더 발전시키기 위하여 대담하게 한 걸음을 더 내딛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맨하탄 문화회관의 무도회장을 벌렸는데 그곳은 보통 결혼식이나 성년 축하식에 쓰이던 곳이었다. 그는 일요일 오후의 강연과 토론을 연속으로 기획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쇄된 안내장으로 그의 첫 강연을 알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열대여섯 사람들이 모였을 뿐이었다.

그 후로 그는 소모임방에 만족하였다. 그러나 그 모임은 빈민가에서 가두연설을 하며 가톨릭 정당을 시작하려는 야망을 가진 두 명의 젊은 정치적 행동주의자들에게 양도되었다. 무시되고 위축된 피터는 유니온 광장의 그의 벤치로 조용히 다시 돌아왔으며 우리는 무도회장의 방세를 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젊은이들은 우리의 결정이 무자비한 것이고 연설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를 비난하였다.

의식의 명료화를 위해...일꾼학교 시작하다

나는 레닌의 미망인인 마담 크루프스카야에 대하여 피터에게 말하면서 그를 위로하려고 하였다.(그가 위로를 필요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레닌의 미망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파리의 공원과 숲에서 개최했던 노동자들의 학교에 관하여 기술한 바 있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의 그 노동자 학교에는 적어도 40명이 모여들었다고 하니 가히 성공적인 시도였던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해 겨울에 사무실에서 우리 스스로 일꾼학교를 시작하였다. 피터는 유명한 사제들과 교사 등 온갖 저명인사들을 초대하였으며 많은 논쟁들이 전개되었다. 주간 내내 매일 밤 피터가 함께 주장을 펼 수 있는 새로운 연설자가 등장했다. 피터는 결코 피곤해 하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아침 2~3시까지 혹은 토론이 계속되는 한 견딜 수 있는 습관이 이미 배어 있었다. 토론이 끝난 후 다음날 정오 미사에 가기 전까지 자곤 하였다.

나는 때때로 피터가 마르크스와 프루동을 흉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은 언젠가 밤새도록 토론을 하고서 이어 영국 해협을 다 건널 때까지도 어떤 동의를 이루지 못한 채 논쟁을 계속했던 일화가 있다.

저명한 인사들이 가난한 이들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우리는 쟈끄 마리탱 같은 유명한 방문객들 대신에 가톨릭대학교의 몇몇 신부들을 초대하였다.

우리에게 다가왔던 이런 강사들은 이제 동부 15번가의 낡은 상점에 모여드는 수십 명의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미국 전역에 퍼져 있던 우리그룹과 비슷한 경향을 가진 학생들과 또 다른 그룹의 사람들은 <가톨릭일꾼> 신문에서 그들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의 사상을 숙고하여 “예식, 문화와 경작”의 통합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전례와 예배와 성서에 대한 토론은 “예식”이라는 제목 아래 두었다. 그러나 모임에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참여했으므로 이러한 토론은 범교파적이기도 했다. 실상 모임들은 다양한 종교 그룹들과 함께 하는 우리의 평화를 위한 작업에 출발점이 되었다. 피터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모두는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함께 만날 수 있었다. 문화는 ‘예식’의 외적 성장이었으며, 피터는 에릭 길의 저서들의 요약본들을 우리에게 주었고 예술가들과 저술가들을 초대하여 말하도록 하였다. “경작”이라는 주제아래 우리는 토지 운동과 협동조합에 관하여 토론하였다.

이러한 토론들이 진행되는 동안 스탠리와 우리의 요리사인 마가렛 그리고 매리 쉬한은 부엌에 앉아 있곤 하였다. 한번은 스탠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만일 우리가 강연에 대해 돈을 지불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한 사람당 백 달러씩은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메리는 커피 주전자를 잡으려고 손을 뻗치면서 “만일 그들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거기에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들으세요!”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리고 마가렛은 특유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두 사람 모두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였다.

어느 날 저녁 나이든 러시아 친구인 안드레이 살라마가 동부의 흑빵 한 덩어리와 달콤한 버터 한 병, 푸짐한 과일과 보드카 한 병을 가지고 왔다. 모임이 사무실에서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부엌 식탁에서 잔치를 즐겼다. 살라마는 하느님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경탄할 만한 기도에 대하여 말하려고 왔는데, 하느님의 어머니에게 드리는 우리의 기도와 아주 많이 비슷했으며, 러시아 전례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보드카를 단숨에 들이키면서 가끔씩 기도들을 힘차게 노래하였다.

흥청거리거나 심각한 토론들 -그때 초기에는-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을 도우려고 왔던 몇몇 젊은 친구들이 알콜 중독 증상을 보이고 난 후로 나머지 우리들은 이러한 기쁨들을 포기하였다. 피터가 모범을 보여주었다. 상황이 그에게 분명해지자 곧 그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다양한 잠자리로 갈 때에 그에게 권하곤 했던 포도주 한 잔도 거절한 것이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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