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설교 하나,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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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설교 하나, 애인
  • 최태선
  • 승인 2022.05.30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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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그리스도교는 정말 다양해졌습니다. 어느 그리스도교가 좋은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마다 장점과 본질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장소와 시대의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여러 요소들이 더해져서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그리스도교라는 생각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습니다.

제 친구의 아내는 정교회 대주교의 설교를 감수하는 일을 했습니다. 외국인인 그의 설교문이 한국어로 정확하게 표현되었는지 살피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강남의 대형교회의 권사님입니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영어에 능통해서 대기업에서도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정교회 대주교의 설교 내용을 살피는 일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교회를 갈 때마다 흠칫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정교회 교인들이 입을 맞추고 지나가는 구조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성수로 손을 씻는 행위도 너무 어색했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정교회 예배에 참석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랬다면 아마도 그 일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정교회만 그럴까요. 어색하기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개신교 교회의 분위기도 교회마다 교단마다 아주 다릅니다. 여러 교단 교회들을 가본 저로서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교단의 예배에 참석하게 된다면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을 아무리 노력해도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한 편에서 그런 에큐매니컬 운동이 계속되고 있지만 에큐매니컬 운동 자체가 그리스도교 분열의 일환이 될 것이라는 것이 저의 예측입니다. 그렇게 교회는 갈라지고 또 갈라져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절대로 그리스도교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서에 기록된 초기교회의 기록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이라 그랬을까요.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교회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네 교회 내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여러 교회들을 방문해서 교회들을 섬겼습니다. 그것도 처음이라 그랬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도 문화는 서로 달랐습니다. 특히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는 엄청났습니다. 사실 그래서 갈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 역시 자신들의 다른 삶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해서 그것이 한 순간에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받는다고 해도 그들에게 익숙해진 삶의 방식이 통일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명료하고 단순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초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자신의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간단한 말 몇 마디에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을 한 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해롭다 여기던 것들은 하나같이 자랑스러운 것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인 그에게 그런 모든 것들은 정말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저는 자신의 믿음의 대가 삼대, 사대라는 것을 자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교회가 얼마나 좋은지 자랑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가톨릭은 가톨릭대로, 정교회는 정교회대로, 개신교는 개신교대로, 각각의 교회들은 교회들대로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이 많은지요. 그래서 사실은 오늘날 교회들이 배설물이 가득 찬 화장실이 된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처럼 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래 전 목회자 영성수련회라는 곳엘 참가했습니다. 그곳의 강사님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사제였던 고신부님과(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최신부님이었습니다. 이분들에게서 처음으로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 들을 수 있었고, 관상기도에 대해 들었습니다. 문제는 매일 새벽기도회에 드리기로 한 성찬식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종파의 성찬식은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집례자에 따라 각기 다르게 진행되었지만 참여했던 사람들은 성체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몸”을 말했고, 잔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일이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주님이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제게 가르쳐주신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서로 다른 종파의, 그것도 성직자(제가 사용하기 싫어하는 단어이지만)라는 사람들이 모여 이뤄낼 수 있었던 하나 됨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우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을 실감할 수 있는 생생한 경험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배설물로 여겨야 할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화장실이 되고 말았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아! 얼마나 장엄한 권면입니까.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지켰습니다. 장인과 도제식 제자 삼기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위의 릴레이였습니다. 장인에게도 도제에게도 중요한 것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였습니다. 장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도제에게 보여주었고, 그리스도인 지원자인 도제는 그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되었을 때(바울처럼) 그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송창식의 애인이 읊조려집니다.

어제 나는 슬펐네
그 여자는 떠났네
떠난다는 말없이
사라져가 버렸네
눈이 몹시 커다란 이름 모를 아가씨
난 사랑했었네
첫눈에 반해 버렸네
어제 나는 울었네
그 여자는 떠났네
눈이 몹시 커다란 이름 모를 아가씨
난 사랑했었네
첫눈에 반해버렸네
어젠 비가 버렸네
종일토록 내렸네
쏟아지는 빗속에 사라져가 버렸네

제 마음입니다. 제 글을 읽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여러분의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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