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관념이 아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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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관념이 아니다, 라고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5.23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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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오월이면 늘 습관처럼 빛고을 광주를 떠올리게 된다. 시인 김준태는 그날을 떠올리며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고 노래했다. “내게 충만되어 오신 하느님을/나는 광주의 신안동에서 보았다/그런 뒤로 가슴이 터질 듯 부풀었고/세상 사람들 누구나가 좋아졌다/내 몸뚱이가 능금처럼 붉어지고/사람들이 이쁘고 환장하게 좋았다/이 숨길 수 없는 환희의 순간/세상 사람들 누구나를 보듬고/첫날밤처럼 씩씩거려 주고 싶어졌다/아아 나는 절망하지 않으련다/아아 나는 미워하거나 울어버리거나/넋마저 놓고 헤매이지 않으련다/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라면 피라미/한 마리라도 소중히 여기련다/아아 나는 숨을 쉬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하찮은 물건이라도/입맞추고 입맞추고 또 입맞추고 살아가리라/사랑에 천번 만번 미치고 열두번 둔갑하여서/이 세상의 똥구멍까지 입맞추리라/사랑에 어질병이 들도록 입맞추리라/아아 나는 정말 하느님을 보았다”라고 썼다.

그는 광주학살의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그 사랑을 보았다는 것이다. 참 어질병이 돌도록 환장하게 아름다운 사랑찬가다.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시인의 시선이 이미 하느님을 닮아 투명하게 바라본 그분이다. 그분의 자비다.

 


내 인생에 그토록 영향을 준 한 마디, 그게 무얼까? 나로 하여금 노동사목에 투신하고,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과 함께 일하게 만들고, <공동선>이란 잡지를 편집하고,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이끌고, 산촌에 들어가 호미를 잡게 하고 지금까지 이끌어 온 것은 어떤 울림이었을까? 돌아보면, 대학 동기동창이 던진 그 한 마디였을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1987년 겨울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 3학년에 복학한 나는 우연히 인천 제물포 지하상가에서 계단을 오르다 동창생을 만났다. 학창시절 말없이 그림자처럼 얌전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친구였다. 김윤경. 내가 군에 있는 동안 이 친구는 여성활동가로 인천 공단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와 커피숍에서 두서너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게 졸업 이후를 물었고, 나는 “신학교에 갈 생각”이라 답했다. 한창 내가 해방신학에 몰두할 때였다. 그 친구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만류하고 나섰다. “종교는 관념론”이라는 것이다. 맑시즘이 한창 대학가를 휩쓸 때였으므로 당연히 그 친구는 내 신앙을 안타까운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종교와 신앙은 철학적으로 부질없는 것이며, 실천적으로 민중의 해방을 배신한다는 것이다.

그날 종교는 관념이 아니라는 내 변명은 실로 구차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 주일에 채 지나기 전에 전화가 왔다. 그 친구가 며칠 전에 새로 이사간 하숙방에서 연탄가스에 질식되어 죽었다는 전갈이다. 이제 살아생전 그 친구에게 내 신앙을 변호할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난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말이다. 결국 남은 생애를 통해 그에게 해명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후로 난 사제나 수도자의 길을 가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여전히 부채처럼 숙제처럼 현실에 참여하는 신앙을 드러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러한 신앙은 거창한 대의 앞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 일상을 통해 얻어야 함을 배우고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빚으실 때 묻어난 그분의 지문처럼 내 영혼에 새겨진 그분의 사랑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시시한 일상에서 그 사랑은 더욱 빛난다. 김준태 시인처럼 고난 속에서 오히려 작은 일상의 거룩함을 체득한 시인이 있었다. 채광석이다.

채광석은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채 2년 여를 보내면서 만난 ‘빈대’를 통해 복음을 듣는다.

"밤새 잠든 육신을 뜯어먹고 탱탱해진 배때지를 주체하지 못한 탓에 비실거리다가 끝내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 숨지 못한 채 비실비실 방바닥에서 버둥거리는 빈대를 아침에 만나 보면, ‘허허 욕심도 많은 친구로군.’ 헛웃음만 입가에 맴돈답디여. 실컷 뜯어 잡숫고는 피부병이나 옮겨 주는 ‘놈’의 행태가 제법 괘씸하오만, 젠장 팔다리에 누덕누덕 빈대가 전해 준 피부병을 잘 보존하였다가, 내 나가서 님을 만나면, ‘반갑소, 이리 반갑고 이리 기분 째질 수가 없소’, 히히거리며 비비적거려선 빈대가 전한 가려움증을 몽땅 옮겨, 매일같이 만나선, 드드득득득득 온몸을 긁어가며 둘이서 킬킬거림이 어떨고. 그리하여 빈대의 염치없음이 간질거리는 그리움이 되어 우리는 항시 마른 몸을 득득 긁으며 사랑이란 남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 사랑이란 함께 긁으며 킬킬 웃는 것, 사랑이란 빈대가 전한 기쁜소식, 사랑이란 피부병에 걸리는 것, 아아 사랑이란 용서하는 것이라..."

가려워야 효자손이 귀한 줄 알고, 남의 손이 시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게 사랑임을 알아채는 순간, 일상은 작은 곳에서부터 혁명이 시작된다. 사랑의 혁명이다. 내 손이 닿는 곳마다 행복이 전파된다. 단, 가렵고 근질거리는 사람에게만 그렇다. 아쉬움이 없는 이에겐 내 손이 무익하다. 그는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나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는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케 하셨다”고 말한 것일 게다. 이스라엘의 가난한 이들은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비천한 여종의 처지를 돌보듯이’ 예수가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된다.

채광석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던 버릇이 습관이 되고 급기야 본성이 되어, 끝끝내 모두 내어주는 사랑을 노래한다. 채광석의 ‘사랑’이란 시에선 “온몸의 피 다 흘리고 눈물마저/바닥나더라도/이제 남은 것은 사랑,/미워하고 미워하며/미워한 끝에 이제/이 삶에서 가랑잎마냥 걸려 있는 것은/사랑뿐이어”라고 말한다.

이처럼 시인은 나를 시의 마음으로 들어올리곤 했다. 항시 몸은 따라잡지 못하지만, 그물을 멀리 던지게 하였다. 수시로 ‘그래도 여전히 나는 속물이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그나마 가난한 눈물을 훔치게 하고, 그들에게서 시선을 놓치 않도록 이끌어 온 것은 바로 그것,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고‘ 증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분은 항상 내 한 걸음 앞에 계셔서 내가 따라잡지 못하고, 그래서 ’아직도 가야할 길‘을 열어놓으신다.

 

* 이 칼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실었던 글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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